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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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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주 (姜錫柱) |
성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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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
생년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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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08-29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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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평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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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직책 |
당 중앙위 위원, 외무성 제1부상, 최고인민회의 제10.11기 대의원 |
특성별 분류 |
외교 북미관계 |
학력 |
평양 국제관계대학 불어과 |
프로필 |
정통외교관. 북한 외교의 실무사령탑 역할을 하고 있다.
대학 재학시절 중국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고 중앙당 국제부 보조지도원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했으며 지도원, 부과장을 거쳐 1980년
국제부 과장이 됐다. 1984년 3월 김영남 국제부장이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으로 전보될 때 함께 자리를 옮겨 외교부
부부장에 기용됐다. 1986년 6월 외교부 제1부부장에 오른 후 이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2006년 1월 현재)
국제사회에 비교적 잘 알려진 몇 안되는 북한 고위 인사 중 한명. 국제무대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90년대 초 불거진
북한 핵개발의혹 해결을 위한 북-미회담의 북한측 대표단장으로 활동하면서. 북-미관계의 기초를 세운 제네바 기본합의문(94.10.21)을
이끌어낸 산파역이었다.
이후 대미관계의 전면에서 실무를 지휘했다. 1999년에는 북한을 방문한 페리보고서의 기초자 윌리엄 페리 미국 대북정책
조정관을 상대했고, 2000년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겸 인민군 최고사령관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차수를 수행해
쌍방 관계개선을 위한 실무접촉을 주도했다.
이외에도 빌 리처드슨(96.11) 미 하원의원과 제임스 레이니(97.7) 전 주한미국 대사, 토니 홀(98.11) 미
하원의원 등 북한을 방문한 대부분의 미국측 인사들은 그와 현안을 논의했다. 1994년 6월 김일성-지미 카터 회담에도
배석한 바 있다.
추진력이 강해 일부 저돌적이라는 평판을 듣기도 한다. 이런 성격 탓으로 1990년대 초반에는 중앙당 국제부와 사전 협의없이
독단적으로 업무를 처리한 것이 문제가 돼 협동농장에 혁명화 교육을 다녀온 경력도 있다. 강석숭 노동당 중앙위원회 당역사연구소
소장의 친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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