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김중린 (金仲麟)
성별  
생년월일   1924
출생지   평북 벽동
주요 직책 당 중앙위 비서(근로단체담당), 당 중앙위 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0.11기 대의원
특성별 분류 대남
학력 맑스-레닌주의 학원
프로필

'살아있는 대남공작의 백과사전'이라는 별명을 듣는 북한 최고의 대남전문가. 195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대남사업'을 주관했다.

해방전에는 초등학교 교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해방 후 중앙당학교 특별반을 거쳐 함북도당 부장으로 당료생활 시작. 6ㆍ25전쟁 중에 소련고급당학교에 유학했고, 귀국 후 중앙당 부부장으로 대남업무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1980년대까지 대남분야 외길을 걸었다.

1962년 10월 대남부서의 하나인 문화부 부장이 됐고, 1969년 4월에는 군부파 숙청으로 실각한 허봉학의 뒤를 이어 대남총책인 중앙당 대남담당 비서에 올랐다.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 때는 정치국 위원으로 권력의 핵심에 입했다. 1972년 남북대화가 시작될 당시 막후협상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대화상대로 나서기도 했다.

1974년 김정일의 후계자 지명 이후 각 분야 업무를 직접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실시한 대남사업에 대한 대대적 검열에서 비판 받고 1975년 말 대남비서에서 전격 해임됐다. 이른바 '혁명화 과정'을 거치면서 1978년 재기했으나 미얀마 아웅산 테러사건(1984)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86년 다시 물러나 중앙통신사 사장으로 좌천. 1988년 또 다시 대남비서에 복귀했으나 1990년 대남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근로단체를 담당(당 중앙위원회 비서)하게 된다.

두뇌회전이 빠르고 정세분석 능력과 문장력이 뛰어나 장수할 수 있었다는 분석.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의 처가쪽 친척으로 전해지고 있어 이것이 그의 부침을 설명하는 한 요인이 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당 중앙위 비서로서 여전히 권력 상층부에 남아 있으면서도 1990년대 말엽에는 다소 소외되는 인상을 주기도 했지 만, 2000년 이후에는 김정일의 공식 활동에 심심치 않게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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