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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서 - 이선희

2023-12-05

ⓒ Getty Images Bank
나는 내 남편이 자동차에 치이거나 혹여 뜀박질하는 말발굽에 채여서라도
다리 하나가 없어지기를 바랐다.
그 이유란 지금으로부터 일곱 달 전에 내가 다리 하나를 잃고 
훌륭히 절름발이랑 이름을 가지고 들어앉게 된 까닭이다.
나는 다리가 하나인데 만일 내 남편이 다리가 둘이 되면
필경 우리 사이의 균형은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균형을 잃은 것은 언제든지 완전한 것이 아니다.

- 방송 내용 중 일부 


의심은 도둑고양이와 같다.

그 새 넥타이를 맨 남편이 이 밤에 내가 아닌 다른 여인에게
좀 더 많은 호감을 사려고 온갖 지혜를 짜내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것인가.

그는 두어 마디 다녀온다는 말을 마치고 전에 없이 급하게 나가 버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려고 했으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그냥 벽에다 몸을 기대버렸다.

도둑고양이와 같은 의심은 내 모든 것을 무시하고 나를 미치게 했다.
내 모든 교양이 애써 쌓아오던 자존심과 체면
그리고 그와 나 사이에 굳게 받들던 믿음을 무시하고 
끝끝내 이러한 결론을 만들고야 말았다.

‘남편은 새 넥타이를 매고 두 다리가 성한 계집을 찾아갔다.’


# 인터뷰. 전소영
주인공이 잃어버린 다리 한 쪽은 결혼 제도를 거치면서 그녀가 처하게 된 곤경과 잃어버린 자유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비판하는 대상은 남편이 아니라 설사 선량한 남성과 결혼을 한다 해도 여성이 가정이나 결혼 제도에 속박이 되어서 상처도 받고 자기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어요. 비단 주인공이 사고를 당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1930년대 결혼제도 안에서 여성과 남성의 지위상의 균형이 깨지기 쉬운 것이었어요. 그래서 주인공은 자신의 계산서가 자기 것만이 아니라 모든 아내 된 자의 계산서가 될 것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밤이 어지간히 깊어진 모양이다.
스토브에 불이 꺼진 지 오래여서 추워서 견딜 수 없다.
아무리 잠이 아니 와도 저 나무 침대 속으로 들어가야 할까보다.
집을 떠나 일곱의 밤을 뜬 눈으로 새워도 조금도 피로를 모르겠다.
기적이란 아마 이따위겠지.

나는 아직 살인을 하지 않은 채 이곳으로 왔다.
받을 것을 다 못 받고 그대로 주저앉는 것이
모든 아내 된 자의 약점이요, 애교인 모양이다.

나는 얼마 동안 이곳에 더 머무를 것이다.
내 계산서를 완전히 청산할 때까지 이 땅에 더 있을 것이다.

이 땅은 마적이 있어서 좋고 
돼지가 죽은 아이 시체를 물고 뜯어먹는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좋고
죽음 같은 고독이 있어서 좋다.



작가 이선희 (함경남도 함흥, 1911~미상)
    - 등단 : 1934년 단편소설 [「불야여인(不夜女人)-가등(街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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