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내용 중 일부 -
저만치 하루꼬가 목을 축 늘어뜨린 채 흐느적흐느적 걸어오고 있다.
“하루꼬! 왜 이렇게 늦었어?”
“응, 영감 아침상이 늦어서. 배가 안 고프다고 거르겠다잖아
그래 기어이 한 숟갈 먹이느라 늦었지“
하루꼬의 영감은 2년 전 이맘 때 세상을 떴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하루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남편상을 봤다.
그랬어도 살아 있는 남편 밥상을 챙겼노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래도 하루꼬가 이상하다.
“하루꼬, 사다꼬네 가자”
“사다꼬?”
“그래, 사다꼬. 우리 동창 사다꼬”
그녀들은 읍내에 하나밖에 없던 보통학교 동창이다.
어려서 만나 일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탓에 아직도 일본이름이 더 친숙하다.
“나 그런 사람 몰라”
사다꼬를 모르다니, 그럴 리가 없다.하루꼬와 사다꼬는 단짝이었다.
“모르긴 왜 몰라! 사다꼬를”
울컥 속이 상해서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인터뷰 : 문학평론가 전소영
사다코, 하루코, 에이코라는 할머니들의 이름이 보여지듯이 이 세분은 일제 강점기 이후에 아주 파란만장했던 한국의 역사적 질곡들을 넘어 온 산 증인 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 역사의 중심에 놓여있다고 여겨진 사람들은 보통 이 할머니들의 남편들이었죠. 이 작품은 역사를 이끌어온 힘이라는 것은 역사의 주변부에 있었다고 여겨졌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소설로서 복원을 하고 있습니다. 즉 간의 역사가 알려진 형제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었다면, 이 소설은 알려지지 않은 자매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셈이죠.
시멘트로 포장된 빌라 주차장에 거칠 데 없는 봄볕이 가득하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살까?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나이이긴 하지만
그녀는 살아있는 한 재미있게 살 작정이다.
살비듬 부스스 떨어지는 노파지만
치근대는 대서소 김영감도 있다.
김영감 팔베게를 베고 자다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녀는 봄 볕 속으로 네 활개를 치며 걸음을 옮긴다.
작가 정지아 (1965. 전라남도 구례.)
: 데뷔-1996.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고욤나무> 당선
수상-2006. 제7회 이효석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