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내용 중 일부 -
아침에 깨어보니 온 누리에 수북하게 첫 눈이 내렸는데,
대문 옆 블록담 위에
왠 흰 남자 고무신 짝 하나가 얌전하게 놓여있었다.
아내와 나는 다 같이 꺼림직한 느낌에 휩싸였다.
“왠 고무신일까. 누가 장난을 했나”
“아무리 장난으로 저랬을라구요”
나는 그 이상한 고무신짝을 들고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분명히 더도 덜도 아닌,남자 고무신짝 하나였다.
“어젯밤도 꽹과리 소리가 밤새 나던데요.
어느 집에서 또 굿을 하는 모양이던데...”
주인은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 고무신짝을 아무 집이나 담장 너머로 던져버립니다.
고무신이 떨어진 또 다른 집 주인은 다시 근처 이웃집으로 던져버렸겠죠.
그렇게 온 동네를 돌고 돌던 고무신짝이
다시 남자의 집으로 돌아온 겁니다.
나는 이미 액투성이 때가 엉기엉기 묻은 듯한
그 고무신짝을 만지기도 싫어서 엇비슷이 건너다보며 투덜거렸다.
“어쩌긴 어째요. 놔두세요, 내가 처리할게”
아내는 독오른 표정이 되며
악착같이 해보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동시에 초등학교 4학년 적의 그 ‘지까다비’짝과
그 때 그 ‘큰 산’이 구름에 깜북 가려졌던 교교한 산천을 떠올렸다.
“‘큰 산’이 안 보여서 이래, 모두가”
#인터뷰 . 큰 산의 의미 –방민호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화 교수
이 큰 산이 아주 암시적이죠. 큰 산은 맑고 막힘 없는 통찰. 시선. 미래에 대한 전망. 또 사람들을 아우르는 어떤 포용 이런 다각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런 보호장치를 잃어버렸을 때, 그런 미래에 대한 어떤 통찰력을 잃어버렸을 때 사람들은 자기 앞에 떨어져 있는 흰 고무신 한 짝에 놀라고 그것을 어떻게든 다른 사람에게 던져 버릴 수 있을까. 멀리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한국사회가 그런 큰 산이 없는 사회의 속성을 갖고 있고. 사람들이 그런 큰 산 없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그런 식의 이야기를 작가는 하고 싶어 했던 것이죠.
작가 이호철 (1932.3.15.~2016.9.18. 함경남도 원산 출생)
: 1950년 단신으로 월남.
1955년 ‘문학예술’에 단편 “탈향” 발표하면서 등단.
1961년 사상계에 단편 “판문점”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