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내용 중 일부 -
등굣길을 잊기 위해 나는 그림에 집중했다.
오전 9시 20분의 빛을 놓치면 안 되었다.
9시 20분에서 50분까지의 빛은
형태의 가장자리를 넓고 투명하게 만드는데,
서서히 엷어졌다가 투명해지는 그 지점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는 것이 목표였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지수는 고등학교 학생인데요
주변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인터뷰 :방민호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제 막 사춘기 여학생인데. 사물,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죠. 예민해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다 아는 척 하지 않지만 면밀히 관찰하고 그런 내성적인 시선으로 그것을 꿰뚫어보는 눈을 갖고 있어요. 제목이 선긋기 있잖아요. 선긋기 라는 것은 선이라는 것은 자기가 파악해 낸 어떤 본질적인 요소를 표현하기 위한 그림 이죠. 사물을 흉내 내는 그림이 아니라 사물의 외형을 뚫고 들어가서 그 본질을 그려내는 그런 식의 그림을 추구하는 그런 여학생이다 하는 것이죠.
나는 아주 천천히 선을 그어 그림을 그렸다.
여러 번 덧대어 긋자 눈을 맞은 듯 음영이 지고
한숨이 나오는 선들이 생겨났다.
나는 그림의 바닥부터 맨위까지 선이 쌓이게 놓아두었다.
결이 되고 면이 되도록 빈 종이에 선을 모으는 기분이었다.
신기하게도 어떤 선은 포동하고 뽀얀 빛을 지녔다.
손끝부터 어깨를 지나 반대편 손끝까지인 것처럼
어떤 것은 벌린 팔을 닮아 보였다.
우리반 아이들은 그림을 보고 의아해했다.
너 왜 선긋기 해? 미술 처음 하는 사람이나 하는 거잖아?
나는 이렇게 가득 모아서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다.
누군가 알아들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작가 이은희
: 데뷔-2015.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수상-2015. 세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선긋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