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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봉별기 - 이상

2023-06-06

ⓒ Getty Images Bank

스물 세 살이요... 3월이요...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면도칼로 다듬어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약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그러나 이내 아직 기를 펴지 못한 청춘이

약탕관을 붙들고 늘어져서는 날 살리라고 보채는 것은 어찌하는 수가 없다.

여관 한등 아래, 밤이면 나는 늘 억울해 했다 


- 방송 내용 중 일부 



지어 가지고 온 약은 집어치우고

나는 금홍이를 사랑하는 데만 골몰했다.

못난 소린 듯 하나 사랑의 힘으로 각혈이 다 멈췄으니까.


나는 금홍이에게 놀음채를 주지 않았다.

왜? 날마다 밤마다 금홍이가 내 방에 있거나 

금홍이 방에 내가 있거나 했기 때문에...


그 대신.. 우(禹)라는 불란서 유학생을 나는 금홍이에게 권하였다.

금홍이는 내 말대로 우씨와 더불어 독탕에 들어갔다.

이 독탕이라는 것은 좀 음란한 설비였다.


나는 또 내 곁방에 와 묵고 있는 C라는 변호사에게도 금홍이를 권하였다.

C는 내 열성에 감동되어 하는 수 없이 금홍이 방을 범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금홍이는 늘 내 곁에 있었다.

그리고 우, C 등등에게서 받은 십 원 지폐를 여러 장 꺼내놓고

어리광 섞어 내게 자랑도 하는 것이었다. 



# 인터뷰. 전소영

제목인 봉별기에서 ‘봉별’이라는 단어는 만남과 헤어짐을 의미하는데요. 작중에서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서사가 금홍이와 내가 만나고 헤어지는 반복의 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둘은 특별히 감정적으로 절절해지지도 않고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1930대 혼란한 식민지의 삶이 아주 덧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설정이기도 한데 그것을 잘 반영한 작중 구절이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입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어떻게 살아도 엉망이고 그런 뜨내기의 인생을 살뿐이라면 속고 속이는 것이 큰 문제가 되겠는가? 이런 말로도 들리는데요. 작중에서 나는 무슨 일이 되었든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그런 태도를 취해야만 겨우 버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괴롭고 또 덧없는 시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술상을 보아 왔다.


나도 한 잔 먹고 금홍이도 한 잔 먹었다.

나는 영변가를 한 마디 하고 금홍이는 육자배기를 한마디 했다.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 생(生)에서의 영이별이라는 결론으로 밀려갔다.


금홍이는 은수저로 소반전을 딱딱 치면서

내가 한 번도 들은 일이 없는 구슬픈 창가를 한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작가 이상 (서울, 1910.08.20.~1937.04.17)

    - 등단 : 1930년 소설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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