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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파차파 캠프와 미주 한인사회 연구... 장태한 교수

#글로벌 코리안 l 2019-07-19

글로벌 코리안

사진 제공 : 장태한 교수

미주 한인사회 연구가 장태환 교수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 선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 최초의 한인타운인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를 세웠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그래서 자료를 통해 이런 사실을 널리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UC리버사이드 소수인종학과의 장태환 교수가 그 주인공으로, 120년 가까운 미주 한인 역사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미국 전국에서 처음으로 뽑힌 소수인종학 박사 1호 한인이자, 미 대입 표준시험인 SAT에서 한국어가 채택되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한인 사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고찰하고 있는 미주 한인사회 연구가인 UC리버사이드 대학의 장태환 교수를 만나본다. 


코리안 아메리칸의 발자취를 찾아서... 

미주한인 이민 역사 발굴, 보존에 앞장서온 장태환 교수가 ‘미주 한인사’(고려대학교 출판부)를 최근 출간했다. ‘미주 한인사’는 UC리버사이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이기도 한 장 교수가 캐롤 박 연구원과 함께 펴낸 영문 도서 '한인사회 간략사(Korean Americans: A Concise History)'의 한글판이다. 

이 책엔 최초의 한인비행학교인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 과정과 새미 리, 김영옥, 이경원 등 한인 이민사의 주역들, 1992년 LA폭동 관련 이야기도 포함됐다. 또 주요 미주 한인 인명사전과 역사 연대표도 수록됐다. 


소수인종학 박사 1호

장태환 교수는 18세 때인 1974년 가족이민으로 LA에 왔다. 1980년 5월엔 고국에서 들려온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에 한인 대학생들과 함께 LA적십자사를 점거, 헌혈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사회학에 대한 깊은 관심이 생기면서 1980년 UC버클리에 편입, 본격적으로 사회학도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만 해도 신생학문이나 다름없던 아시안아메리칸 스터디에 푹 빠져 1982년 대학 졸업 후 캘리포니아에서 유일하게 아시안아메리칸 스터디 석사과정이 있는 UCLA 대학원에 진학했다. 2년 뒤 '광주 민중항쟁이 LA사인사회에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모교인 버클리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다. 당시 버클리는 미 전국에서 처음으로 소수인종학 박사과정을 개설해 1990년 소수인종학 박사 1호 7명을 배출했는데 그중 유일한 한인이 장태환 교수다. 장 교수는 1992년 UC리버사이드 소수인종학과로 자리를 옮겨 이곳에서 25년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미 대입 시험인 SAT2에 한국어 채택 일등공신 

1993년 칼리지보드에서 SAT2 한국어 채택을 약속했다 1995년 돌연 불발되자 칼리지보드 회장을 만나 한인사회가 예산 50만 달러를 충당하는 조건으로 한국어 채택을 담판 짓기도 했다. 이처럼 SAT2 한국어시험 채택의 공을 인정받아 장 교수는 김영삼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또 1999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2002년까지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정부의 강압적 또는 사기에 의해 끌려간 것이라는 증거자료를 찾아내 당시 법적소송의 근거를 마련하기도 했다.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이끌며 미주 이민사 정립 위해 노력 

2010년부터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소장을 맡아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최근 연구소의 주목할 만한 성과는 지난 3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파차파 캠프가 한인촌의 효시임을 밝혀낸 것인데 현재 리버사이드 시정부가 이를 사적지로 추진할 만큼 주류사회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주한인 역사를 제대로 정립해 차세대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줘 이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한인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오랜 바람, 이라고 장 교수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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