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으로 몰려 불법 고문을 당한 피해자의 재심에서 고문을 하지 않았다고 위증한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옛 안기부 수사관이, 항소심에서도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지난 6월 사건 발생 34년 만에 법정에서 구속된 이 수사관은, 항소심에서 입장을 바꿔 혐의를 모두 인정했지만, 실형 선고를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5-2부(유석동 이관형 최병률 부장판사)는 위증 혐의로 기소된 76살 구 모 씨의 항소심에서 검사와 구 씨의 항소를 모두 기각하고,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옛 안기부 수사관이었던 구 씨는,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고 심진구 씨의 재심 재판에 2012년 4월 증인으로 출석해 위증한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당시 구 씨는 '수사 과정에서 심 씨를 고문한 사실이 있느냐'는 취지의 검사 질문에 '고문한 적이 없고 심 씨가 자백해 다툼이 없었다'고 증언했는데, 재판부는 구 씨 증언을 배척하고 심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심 씨는 2013년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확정받았습니다.
이후 심 씨의 유족이 지난해 3월 구 씨를 위증 혐의로 고소했고, 1심 재판부는 지난 6월 구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사건이 벌어진 1986년 이후 지금까지도 구 씨가 피해자 측에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진술을 수시로 바꾸면서 법의 심판을 피하려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항소심이 시작되자 구 씨 변호인은 "구 씨가 당심에 이르러서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구 씨가 고령이라 수감생활을 하기 어렵다며 보석을 청구했는데 재판부는 지난달 28일 이를 기각했습니다.
검사는 1심에서와 마찬가지로 구 씨에게 징역 2년을 구형하며 "피해자 유족이 구 씨에 대한 엄벌을 원하고 있고, 구 씨가 원심에서 범행을 부인하고 반성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하면 양형이 지나치게 가볍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구 씨 변호인은 "구 씨가 안기부 수사관으로서 당시 대공 용의자였던 심 씨에게 가혹 행위를 하고 고통을 준 점은 부인할 여지가 없고 유족에게 진심으로 사죄와 위로의 말을 전한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심 씨에 대한 가혹 행위는 구 씨 개인의 행위이기 앞서서 안기부 조직과 국가 구성원 모두가 반성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라며 "구 씨 개인에 대한 형사처벌보단 국가 차원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 활동, 사법부의 재심, 형사보상 등을 통해 심 씨와 같은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구 씨도 최후진술에서 "안기부에서 근무하면서 선배 수사관들로부터 수사기법을 배웠고 자연스럽게 용의자에 대해 가혹 행위를 하는 법도 배웠다"며 "고인이 된 심 씨를 수사할 때도 북한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겠다는 애국심의 발로에서 가혹 행위가 큰 죄가 된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으나, 고인에 대한 가혹 행위가 정말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작금에 이르러 알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재판에 나온 고 심진구 씨 유족은 "30여 년을 눈물과 아주 극심한 고통으로 지내오다가 결국 고인이 병을 얻어 사망하게 됐다"며 구 씨를 엄벌에 처해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한편 심 씨는 1987년 출소 이후 재판과 언론 등을 통해 자신이 받은 가혹행위를 폭로하고, 2004년 서울중앙지검에 안기부 수사관 등을 상대로 고소장을 제출했지만 검찰은 공소시효 완성을 이유로 '공소권 없음' 처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