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그리고
70년의 파노라마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민족의 비극 6.25 전쟁 그리고 그 후 70년.... 총성과 포성, 전쟁의 상처로 인한 울부짖음은 오래 전에 멈췄지만 분단의 아픔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때론 충돌하고 반목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평화로운 하나 된 조국을 향해 걸어온 지난 70년을 돌아봅니다.

6.25전쟁 배경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35년 만에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기쁨도 잠시,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진영을 대표하는 소련의 냉전이 심화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 역시 고조됩니다.
미국과 소련의 강제 군정 하에 결국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데요.

이후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 사이에 군사 충돌도 자주 일어납니다.
전쟁의 기운은 이때부터 조금씩 싹 트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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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그 날은 평화로운 일요일 새벽이었습니다.
당시 군 지휘부엔 인사이동이 있었고 남한의 많은 병사들은 외출이나 농번기 휴가를 나갔었지요.
이러한 빈틈을 노린 북한은 치밀한 계획 아래 38도 선 전역에서 무차별적으로 남한을 공격합니다.
무서운 기세로 내려온 북한은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을 함락하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두 달 만에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이 북한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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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군 참전

6월 26일 UN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 개최되고 즉각적인 전투행위 중지와 북한의 38도선 이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가결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침을 감행하자 6월 28일 UN은 군사적 제재를 통하여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결의를 하고 7월 7일 UN군사령부를 창설, 맥아더 원수를 UN군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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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체결

1951년 7월 10일부터 시작된 휴전 협상은 만 2년간 계속되어 ‘세계 최장의 휴전회담’이라는 진기록을 세운 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그 끝을 보게 됩니다.

휴전 협정, 시작부터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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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결과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총 3년 1개월, 1129일 동안 계속된 이 전쟁에서 대한민국 국군 13만 8천여 명이 전사하고 45만여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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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한국전쟁 [출처 : 연합뉴스]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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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War: Memories of the War the Korean War: Memories of the War
공공누리의 제 4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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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배경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35년 만에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기쁨도 잠시,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진영을 대표하는 소련의 냉전이 심화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 역시 고조됩니다.
미국과 소련의 강제 군정 하에 결국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데요.

이후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 사이에 군사 충돌도 자주 일어납니다.
전쟁의 기운은 이때부터 조금씩 싹 트고 있었습니다.

6.25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그 날은 평화로운 일요일 새벽이었습니다.
당시 군 지휘부엔 인사이동이 있었고 남한의 많은 병사들은 외출이나 농번기 휴가를 나갔었지요.
이러한 빈틈을 노린 북한은 치밀한 계획 아래 38도 선 전역에서 무차별적으로 남한을 공격합니다.

무서운 기세로 내려온 북한은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을 함락하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두 달 만에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이 북한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1950.6.25 북한군 남침, 1950.6.28 북한군 서울 점령, 1950.7월말 북한군 낙동강 진출, 1950.8.1 국군, 유엔군 낙동강 방어선 구축, 1950.8.18 정부 대구 → 부산 이전 - 출처:대한민국 국방부

UN군 참전

6월 26일 UN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 개최되고 즉각적인 전투행위 중지와 북한의 38도선 이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가결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침을 감행하자 6월 28일 UN은 군사적 제재를 통하여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결의를 하고 7월 7일 UN군사령부를 창설, 맥아더 원수를 UN군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6.25전쟁 당시 우리와 함께 싸워 준 UN 참전국은 총 21개 국가입니다.

전투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전투부대 파견국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터키,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룩셈부르크 등 16개국이고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서독은 의료지원국으로써 활동을 했습니다.
또한 한국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물자 및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은 국가도 많습니다.

UN군 참전

UN군 반격과 북진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전격적으로 인천상륙 작전을 감행하고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작전을 단행합니다.
전세는 역전되고 북한군은 9월 23일 이후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9월 28일 마침내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1일 38선도 회복하지요.
38도선을 넘어 북한지역으로 총반격작전을 개시한 끝에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원산, 함흥을 거처 국토 통일을 눈앞에 둡니다.
1950.9.15 국군·유엔군 인천상륙작전, 1950.9.28 국군·유엔군 서울 수복, 1950.10.1 국군 38도선 돌파, 1950.10.19 국군·유엔군 평양 점령, 이후 압록강 도달 - 출처:대한민국 국방부

UN군 참전

중공군 침공과 UN군 재 반격
10월 25일,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게 됩니다.
중공군의 사상 유례없는 인해전술로 전세는 다시 뒤집힙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미처 방어태세를 갖출 겨를도 없이 철수하는데요.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포기, 전략적 후퇴를 합니다.
반격에 나선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다시 북쪽으로 진격하자 38선을 중심으로 전선은 고착화되고 소모적인 전투가 반복됩니다.
1951년 7월 10일, 마침내 휴전회담이 개시되면서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1950.10.25 준공군 개입 시작, 1951.1.14 1·4 후퇴, 1951.3.15 국군 서울 재수복 - 출처:대한민국 국방부

정전협정 체결

1951년 7월 10일부터 시작된 휴전 협상은 만 2년간 계속되어 ‘세계 최장의 휴전회담’이라는 진기록을 세운 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그 끝을 보게 됩니다.

휴전 협정, 시작부터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립니다.

  • 1 가장 첨예한 대립은 군사분계선 설정이었죠.
    전쟁 이전의 38도선을 주장하는 공산군 측과 현재보다 북쪽에 분계선을 설정해야 한다는 유엔군 측의 주장이 맞선 가운데, 회담이 중단됐다 재개되는 우여곡절 끝에 1951년 11월 27일, 당시 양측이 접촉하고 있는 전장 237킬로미터의 전선을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기로 합의합니다.
  • 2 또 하나의 난제는 포로송환이었습니다.
    유엔군은 당초 ‘제네바 협정’에 따라 모든 포로를 북으로 송환할 계획이었는데 다수의 포로들이 귀환을 거부하죠.
    협상은 진척되지 않았고, 시간은 계속 흐릅니다.
    결국 서방 언론과 국제적십자까지 나서 여론을 환기시켰고 공산군 측도 이 안에 결국 동의해 1953년 6월, 휴전회담의 최대 난제였던 포로송환 문제가 타결됩니다.
  • 3 휴전이 목전에 다가왔지만 불완전한 분단에 대해 한국 정부가 반대하고 나섭니다.
    1953년 4월, 대한민국 국회는 휴전 반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필요하다면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전쟁을 계속할 것을 결의합니다.
    이후 지난한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대표가 정전협정문에 서명을 하고 정전협정 발효 시간인 정각 22시가 되자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됐던 포성이 거짓말처럼 멎었습니다.
1951.7.10 휴전회담 시작, 1953.7.27 판문점에서 정전협정 조인, 1953.10.1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6.25전쟁은 멈추었지만 전쟁이 남긴 피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 출처:대한민국 국방부

6.25전쟁 결과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총 3년 1개월, 1129일 동안 계속된 이 전쟁에서 대한민국 국군 13만 8천여 명이 전사하고 45만여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실종자까지 포함하면 국군의 인명피해는 62만 천여 명에 달합니다.
북한군의 사망자와 부상자는 52만 명, 실종자까지 포함하면 80만 명입니다.
유엔군의 피해도 컸습니다.
사망자 4만 천여 명, 부상자 10만 4천 여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15만 5천여 명에 달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6.25는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더 많았던 전쟁인데요.
학살, 부상, 실종 등으로 1백만여 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고, 북한의 민간인 인명피해도 155만에 달합니다.
종합하면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인명 피해 뿐 아니라, 6.25 전쟁은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큰 피해를 남겼는데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 시설의 43%, 탄광시설의 50%가 피해를 입었으며, 총 피해액은 22억 8105만 달러에 달합니다.

또 이 전쟁으로 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고 30만여 명의 여성이 남편을, 10만여 명이 부모를 잃었고 한반도는 아직까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슬픈 별칭을 갖게 됐습니다.

남북관계 폐색기

~1969

1 북한의 대남 수해지원 의사 거절

1956년 7월

1956년 7월 14일부터 열흘 동안 남한에 내린 폭우로 남한 전역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상자 68명이 발생하고 약 43억 7천 7백만 환의 피해액이 집계됐는데요.
북한 조선적십자사는 7월 27일 대한적십자사 앞으로 홍수 이재민들에 대한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북한의 지원 의사를 ‘정치 공세’로 보고 이를 거절합니다.

한강수해광경2 한강수해광경3 출처 : 국가기록원

2 남북체육회담 개최

1963년 1월 24일

국제올림픽위원회, IOC가 한국과 북한의 올림픽 단일팀 출전 권고함에 따라 남북은 1963년 스위스 로잔에서 단일팀 구성을 위한 첫 번째 회담을 엽니다. 그러나 이어진 두 차례의 회담에서도 남북은 끝내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고 단일팀 구성은 무산되고 맙니다.

3 1.21 사태

1968년 1월 21일

1·21 사태는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던 사건을 말합니다.
북한의 무장 게릴라 31명은 휴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해 수도권까지 잠입하는데 성공하는데요.
청와대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자하문 초소에서 정체가 드러나자 공비들은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 단총을 난사하는 한편,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희생됐습니다.
군경은 즉시 공작원 소탕 작전에 나서 은신 중이던 김신조를 발견해 생포하고, 28명을 사살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남북관계는 긴장이 고조되었고 우리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해 향토예비군을 창설합니다.

1.21사태무장공비사건현장 출처 : 국가기록원

남북관계 태동기

1970~1979

4 제1차 남북 적십자 접촉

1971년 8월 20일

국제적 냉전 분위기 아래 1960년대까지 좀처럼 대화에 나서지 못했던 남과 북은 1970년대 들어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습니다.
1971년 8월 20일,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 적십자 파견원 제1차 접촉'이 최초의 남북대화였는데요. 대한적십자사의 회담 제의를 북한이 동의해 성사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1972년 8월부터 다음 해 7월까지 이산가족들의 주소와 생사확인, 방문과 상봉, 서신 왕래 등을 의제로 일곱 차례에 걸쳐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진행되었습니다.

1차 남북적십자예비회담 출처 : KDAS

5 7·4 남북공동성명

1972년 7월 4일

1971년 말부터 1972년 3월까지 남북한은 판문점에서 비밀접촉을 가졌습니다.
이 접촉의 성과를 바탕으로 1972년 5월 초에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과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의 서울방문이 실현되어 남북한 간의 정치적 의견 교환이 처음 이루어졌는데요.
7월 4일 마침내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한은 최초의 공식 합의문서인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됩니다.
남북한이 분단 27년 만에 처음으로 합의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은 이후 남북한 간에 이뤄진 모든 접촉과 대화의 기본지침이 됐습니다.

남북공동성명발표관련신문 출처 : 국가기록원

6 6.23 선언

1973년 6월 23일

남북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은 6.23 선언을 발표합니다.
주요 내용은 남북한은 서로 내정에 간섭하지 않으며,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 및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에 반대하지 않고, 호혜평등(互惠平等)의 원칙 아래 모든 국가에게 문호를 개방한다는 것입니다.
이 선언은 기존의 적대적이고 폐쇄적인 통일정책을 탈피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평화통일의지를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북한은 이 6·23선언이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를 인정함으로써 분단을 영구화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이후 남북대화는 다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6.23 평화통일외교선언 출처 : KDAS

7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76년 8월 18일

1976년 8월 18일, UN군 소속 미군 장교들이 공동경비구역 초소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전방 시야를 가리고 있는 미루나무 한 그루를 발견해 가지치기 작업을 하려는데, 북한군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미군과 북한군의 신경전이 시작됩니다.
신경전은 양측의 충돌로 이어졌고 심지어 북한군은 노동자들이 달아나면서 버려진 벌목 도끼로 두 명의 주한 미군을 참혹하게 살해했는데요.
정작 이 충격적인 사건을 벌인 북한 측은 사과는커녕 오히려 한국과 미국 측에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협상은 결렬됐고 6.25전쟁 이후로 최초로 주한 UN 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준전시체제에 돌입합니다.
하지만 베트남전에서 타격을 입은 미국도 전면전을 일으키기엔 부담이 있었습니다.
결국 ‘미루나무’를 자르는 선에서 이 사건을 마무리 짓기로 하고, 북한 김일성 주석의 유감 표명을 미국이 받아들이면서 일단락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판문점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확실한 경계가 세워졌습니다.

판문점도끼만행사건1 출처 : 국가기록원

남북관계 정립기

1980~1987

8 아웅산 테러 사건

1983년 10월 9일

1983년 10월 9일,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대양주 6개국 공식순방 첫 방문국인 미얀마(당시 버마)의 수도 양곤에서 대통령의 아웅산 묘소 참배행사를 위하여 대기 중이던 정부요인과 수행 기자 등 17명이 북한 테러분자가 장치한 폭발물의 폭파로 사망하고, 14명의 인사가 중경상을 입는 세계 외교사상 유례없는 일대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미얀마 정부는 주범 2명을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북한과 국교를 단절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84년 10월 미얀마 정부는 아웅산 사건은 북한의 소행이라고 국제연합에 보고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3개국이 북한과의 외교를 단절했고 69개국이 대북한 규탄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버마 아웅산묘소 폭발사건 치밀한 계획테러 1 버마 아웅산묘소 폭발사건 치밀한 계획테러 2 버마 아웅산묘소 폭발사건 치밀한 계획테러 3 출처 : KDAS

9 북한의 대남 수해지원

1984년 9월 29일~ 10월 4일

1984년 여름, 8월 31일부터 5일간 내린 집중호우로 인해 서울에는 최악의 홍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재해 복구로 힘든 나날을 이어가던 중, 9월 8일 북한적십자회가 ‘동포애와 인도주의 입장’에서 남한의 이재민에게 구호 물품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해 옵니다.
대한적십자사는 9월 14일에 북측의 제의를 수락한다고 발표했고 북한의 지원 물자는 인천항과 판문점을 통해 남측에 전달됩니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 간 최초의 물자교류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북한의 대남 수재물자 지원은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경색되었던 남북관계에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북한측으로부터수해물자인수1 출처 : 국가기록원 북한 적십자사가 보내온 수해물자 인수(시멘트) 출처 : e영상역사관

10 남북이산가족 첫 상봉

1985년 9월 20일

1985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남북적십자 본회담의 합의에 따라 분단 이후 최초로 이산가족의 고향 방문과 예술 공연단의 서울·평양 교환 방문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은 남한 측 단원 중 35명이 평양에서, 북한 측 단원 중 30명이 서울에서 각각 가족을 만났는데요. 또 서울예술단은 평양대극장에서 두 차례 공연했고, 평양예술단도 서울 국립극장에서 두 차례 공연을 가졌습니다. 이 행사는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 민간인이 교류한 사례입니다.

평양의 우리측 고향방문단 이산가족 상봉 평양의 우리측 고향방문단 이산가족 상봉 출처 : KDAS

11 북한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

1985년 12월 12일

1980년 북한이 영변에 원자로를 자체 개발하여 건설하고 1985년 핵재처리시설을 건설하면서 북한의 핵개발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에 소련은 북한에 핵개발을 중단하라는 압박을 가하는데요. 결국 북한은 1985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고 그 대가로 소련으로부터 전투기 등의 군사무기를 지원받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IAEA의 핵안전조치협정 체결 문제를 둘러싸고 계속 대립하다가 NPT 조약 가입 후 6년 만인 1992년 1월 30일에서야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12 KAL기 폭파 사건

1987년 11월 29일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KE858 여객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2인조 북한 특수 공작원에 의해 공중 폭파됐습니다.
당시 정부는 조사를 통해 ‘북한 지령을 받은 공작원들에 의한 항공기 공중 폭발 테러’란 결론을 내리고 용의자 김현희를 한국으로 압송했습니다.

1987년 KAL 858기 폭파_1 1987년 KAL 858기 폭파_2 출처 : e영상역사관

화해·협력 모색기

1988~1997

13 남북탁구 단일팀 세계선수권 우승

1991년 4월 24일~5월 6일

1991년 4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분단 이후 처음으로 결성된 남북한 단일팀 ‘코리아’가 출전합니다.
여자단체전 결승에서 단일팀은 세계최강 중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데요. 남자팀도 단체전 4강 진출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둡니다.
지바 대회에서 팀 코리아가 처음 사용한 한반도기와 아리랑은 그 이후 계속해 남북 단일팀의 대표성을 띄게 됩니다.

1991년 지바탁구세계선수권 KOREA 단일팀 출전_1 1991년 지바탁구세계선수권 KOREA 단일팀 출전_2 1991년 지바탁구세계선수권 KOREA 단일팀 출전_3 1991년 지바탁구세계선수권 KOREA 단일팀 출전_4 1991년 지바탁구세계선수권 KOREA 단일팀 출전_5 출처 : KDAS

14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1991년 9월 18일

1991년 9월 18일 열린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은 각기 별개의 의석을 가진 회원국으로 유엔에 가입합니다.
이로써 남북한은 분단 46년, 유엔 창설 46년 만에 각기 독립된 국가의 자격으로 유엔 회원국이 됐는데요. 남북 당국은 본래 유엔 가입에 대해 커다란 입장 차이를 보였습니다.
한국은 유엔 단독 가입을 추진한 반면, 북한은 단독 가입이 분단을 고착화시키려는 의도라며 반대했는데요.
그러나 냉전의 종식으로 인해 소련과 중국이 한국의 유엔가입을 반대하지 않게 됨에 따라, 국제관계에서의 고립을 우려한 북한도 유엔 동시 가입으로 입장을 바꿉니다.
남북의 유엔 가입으로 남북한의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고, 남북 관계의 정상화와 함께 대외 관계에서 새로운 발판이 마련됐습니다.

1991년 9월 18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_1 1991년 9월 18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_2 1991년 9월 18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_3 1991년 9월 18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_5 출처 : KDAS

15 남북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합의

1991년 12월 31일

1991년 12월 31일 한반도 핵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세 차례의 남북대표 접촉 끝에 양측 대표들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합니다.
비핵화공동선언에는 핵무기 시험·제조·생산 금지, 우라늄농축시설 보유 금지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남북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합의_1 남북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합의_2 출처 : KDAS

16 북한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

1993년 3월 12일

북한은 1987년부터 1992년 베이징에서 미국과 관계개선 회담을 진행합니다.
그런데 요구하는 바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를 탈퇴하겠다는 정부 성명을 발표합니다.
NPT를 탈퇴하겠다는 의미는 사실상 핵개발을 하겠다는 의미였기에 국제사회에 큰 위협감을 불러왔습니다.

1993년 북한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_1 1993년 북한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_2 1993년 북한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_3 1993년 북한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_4 출처 : KDAS

17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체결

1994년 10월 21일

북한의 NPT탈퇴에 대해 국제사회는 국제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라며 일제히 비난을 쏟아내고 제재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북중동맹조약'으로 인한 중국의 군사 개입 가능성에 부담을 느꼈고, 북한 또한 핵개발로 인한 장기적 국제적 고립과 심화되고 있는 경제난을 우려했습니다.
이에 양국은 협상을 진행하고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문을 체결합니다.
제네바 합의서는 북한이 핵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 측은 경수형 원자로 발전소 2기를 제공하고 연 50만t의 중유를 제공하며 정치·경제적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를 추진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체결_1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체결_2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체결_4 출처 : KDAS

18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소떼 방북

1998년 6월과 10월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이 1998년 6월과 10월, 소 10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갔습니다.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나고 자란 정주영 회장은 17세에 아버지가 소를 팔아 마련한 돈 70원을 몰래 들고 남쪽으로 내려와 일을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그때 북에서 들고 나온 소 한 마리의 값을 갚기 위해, 소 1001마리를 몰고 고향인 북한으로 간 것이지요.
소떼 방북은 남북 교류가 활발해지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소떼 방북_1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소떼 방북_2 출처 : e영상역사관

19 금강산관광 시작

1998년 11월 18일

1998년 11월 18일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한국의 민간인들이 북한을 여행하는, 남북 분단 50년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한국의 기업인 현대그룹의 10년간의 노력과 정부의 햇볕정책이 맞물려 이루어질 수 있었던 남북 협력의 상징이지만 남북 관계의 부침에 따라 금강산관광사업 역시 어려움을 겪습니다.

1998년 11월 금강산관광 시작_1 1998년 11월 금강산관광 시작_2 출처 : KDAS

20 제1연평해전

1999년 6월 15일

1999년 6월 15일 오전 북한 측 경비정과 어뢰정 4척이 꽃게잡이 어선 20척과 함께 NLL 남쪽 2㎞ 해역까지 내려왔습니다.
우리 해군은 경고방송 후 두 차례에 걸쳐 선체를 이용한 밀어내기 경고를 실행합니다.
이날 교전으로 우리 해군장병 7명이 부상을 입었고 북한은 함정 1척이 침몰하고 5척이 크게 부서지는 등의 피해를 입습니다.

1999년 제1연평해전_1 1999년 제1연평해전_2 출처 : KDAS

21 6·15 남북공동선언

2000년 6월 15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취임사에서 남북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천명했고, 이후 정부는 남북정상회담과 특사교환을 제의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00년 6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됩니다.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3일간 평양에서 회담을 열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합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만남은 남북의 적대적 관계를 종식하고 통일시대를 열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2000 6·15 남북공동선언 출처 : KDAS

22 경의선 철도연결 합의

2000년 7월 31일

남북 분단 이후 경의선은 남측의 12km 구간과 북측 8km 구간 등 총 20km 구간이 철로가 끊어진 채 황폐해져 있었는데요.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개최된 남북장관급회담을 통해 경의선 복원 연결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그해 9월에 우리나라는 문산에서 휴전선까지, 북한은 개성에서 휴전선까지 각각 철도공사를 진행했습니다.

2000년 7월 31일 경의선 철도연결 합의_1 2000년 7월 31일 경의선 철도연결 합의_2 출처 : KDAS

23 제1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행사

2000년 8월 15일 ~ 8월 18일

1985년 9월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 공연단 교환 방문 이후 15년 간 진전이 없던 이산가족 문제는 2000년 6월 열린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에서의 합의에 따라 서울과 평양에서 1,170명의 이산가족이 상봉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2003년 11월 열린 5차 적십자회담에서 남북한은 화상 상봉에 합의해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고 2007년 11월 개최된 9차 적십자회담을 통해 상봉규모의 확대와 정례화에 합의했는데요.
2008년 2월 5일에는 판문점 연락관 접촉을 통해 ‘이산가족 영상편지 교환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고, 각각 20가족씩 영상편지를 교환했습니다.
2008년 초에 이루어진 영상편지 시범교환 이후 2009년과 2010년, 17차와 18차 대면상봉이 이뤄집니다.
2010년 말 발생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잠시 중단되었던 이산가족 상봉은 2014년 2월 제19차 대면상봉으로 재개되고 이어 2015년 8월 25일 남북 고위급 접촉 합의문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 방침이 정해지면서 10월 제20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진행됩니다.
이후 2018년 4·27 판문점선언에서 남북 두 정상이 이산가족 상봉에 합의함에 따라 2018년 8월 금강산에서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렸습니다.

2000년 8월 제1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행사_1 2000년 8월 제1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행사_2 출처 : KDAS

24 도라산역 개통

2002년 4월 11일

1906년에 개통해 서울과 신의주를 잇던 경의선은 한국전쟁 당시 운행이 중단되었는데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의 후속조치로 서울-신의주간 철도 연결 사업을 합의하면서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2년 4월 도라산 역이 개통 됩니다.
도라산 역은 북으로는 갈 수 없는 반쪽 역이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문해 연설한 뒤,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됩니다.

2002년 4월 11일 경의선 도라산역 개통_1 2002년 4월 11일 경의선 도라산역 개통_2 출처 : KDAS

25 제2차 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

‘제2차 연평해전’은 2002 한일 월드컵 3·4위전이 열렸던 6월 29일, 북한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해, 우리 해군의 참수리 357호정에 기습공격을 가함으로써 발발한 해전입니다.
남과 북의 함정은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받는 격전을 벌였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해군의 함장 윤영하 소령 등 장병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습니다.
북측도 약 30여 명의 사 상자를 내고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했는데요.
제2차 연평해전은 2002년 4월 남측 특사의 방북을 통해 남북관계 복원에 합의한 직후에 발생해 충격을 줬습니다.

2002년 6월 제2차 연평해전 출처 : KDAS

26 북한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선언

2003년 1월 10일

북한의 핵사찰 비협조와 이에 따른 미국의 경수로 공사 지연 등으로 북한과 미국은 갈등을 빚는데요. 여기에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개발 의혹이 불거짐에 따라 2차 북핵 위기가 발생합니다.
결국 북한은 핵동결을 해제하고 핵시설 재가동을 선언하였으며, 곧이어 북한은 2003년 1월 10일 정부성명을 통해 다시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합니다.
북한의 NPT 탈퇴 선언은 1970년에 NPT가 발효된 이래 유례가 없는 것으로 이는 세계적인 핵확산 방지 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3년 1월 10일_북한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선언_1 2003년 1월 10일_북한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선언_2 출처 : KDAS

27 개성공단 착공

2003년 6월 15일

개성공단조성은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토지와 인력이 결합한 남북교류협력의 새로운 장을 마련한 역사적인 사업인데요.
2004년 6월 시범단지에 15개 기업이 입주하면서 시작된 개성공단은 경제적 측면 외에도 사회 문화적으로 큰 의미를 갖습니다.
개성공단이 남북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비약적으로 증가해 2015년에는 전체의 99.6%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개성공단은 북측 근로자 5만 4,800여 명과 남측 800여 명이 함께 생산 활동하는 경제공동체와 생활공동체로 발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의 불안정성과 북핵 문제 등으로 개성공단은 수차례의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결국, 2016년 2월에는 북한의 4차 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개성공단 수익금의 핵무기 개발 전용 의혹 등으로 우리 정부가 전면 가동 중단 조치를 내려 현재 잠정 폐쇄된 상황입니다.

개성공단착공_1 개성공단착공_2 출처 : KDAS

28 북한 핵무기 보유 선언

2005년 2월 10일

북한은 2005년 2월 외무성 성명을 통해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며 핵무기 보유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이후 북한은 2012년 4월 개정헌법에 핵보유국임을 명기했습니다.

북한핵무기보유선언_1 북한핵무기보유선언_2 북한핵무기보유선언_3 출처 : KDAS

29 9.19 공동성명 채택

2005년 9월 19일

2005년 9월 19일 북한은 ‘모든 핵을 포기한다’라는 ‘결단’을 국제 사회에 천명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과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6개국 수석대표들은 제4차 6자 회담에서 이른바 ‘9.19 공동성명’에 합의하는데요, 북한의 핵 포기가 한반도 비핵화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평화 체제 구축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성명 직후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고 북한도 2006년 7월 미사일 발사와 10월 1차 핵실험으로 응수하면서 9.19 공동선언은 사실상 파기됐습니다.

공동성명채택_1 공동성명채택_1 출처 : KDAS

30 북한 제1차 핵실험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2006년 10월 9일 제1차 핵실험을 강행합니다.
주변국의 우려, 특히 중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미사일 시험 발사를 강행하자 미국은 북한에 대한 강도 높은 압박을 의미하는 유엔 결의를 주도했지요.
이에 북한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전쟁 억지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며 정면 반발합니다.
당사국들은 대량살상무기 개발 관련 물자 장비 기술 및 자산의 거래와 이전을 방지하며, 관련 북한 인사의 입국과 경유를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18호를 채택합니다.

북한1차핵실험_1 북한1차핵실험_2 북한1차핵실험_3 북한1차핵실험_4 출처 : KDAS

31 2007년 남북정상회담 & 10.4 선언

2007년 10월 2일 ~ 10월 4일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대한민국의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집니다.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첫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회담이어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라고도 하는데요.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2일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10월 3일 남북 정상이 회담을 열고, 10월 4일에는 6·15남북공동선언에 기초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을 채택합니다.
선언문에는 한반도 핵 문제 해결을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 추진, 남북 경제협력사업의 적극 활성화, 이산가족 상봉 확대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2007남북정상회담 출처 : KBS News

32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2008년 7월 11일

2008년 상반기까지 금강산관광사업은 양적·질적으로 크게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불행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2008년 7월 11일 우리 금강산 관광객이 북한 군인의 총격을 받아 사망한 것인데요.
정부는 이를 우리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중대한 문제로 보고 2008년 7월 12일부터 금강산 관광을 잠정 중단했습니다.

금강산관광객피격사건_1 금강산관광객피격사건_2 출처 : KDAS

33 북한 제2차 핵실험 실시

2009년 5월 25일

북한은 2009년 5월 25일 2차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장소는 1차 핵실험 때와 같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였는데요.
국제사회는 한 목소리로 이를 비난했고 유엔 안보리는 2009년 6월 12일 더욱 강화된 대북제재를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 1874호를 채택합니다.

북한2차핵실험실시_1 북한2차핵실험실시_2 북한2차핵실험실시_3 출처 : KDAS

34 천안함 폭침 사건

2010년 3월 26일

2010년 3월 26일 21시 22분, 우리 해군의 1,200톤급 초계함인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습니다.
천안함에 탑승하고 있던 승조원 104명 중 58명이 구조되었지만 46명은 실종, 모두 전사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우리 군은 공정한 사고원인 조사를 위하여 3월 미국, 영국, 호주, 스웨덴 등 4개국 전문가가 포함된 민·군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원인 조사에 착수합니다.
합동조사단은 5월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데요. 사고해역에서 건져 올린 북한의 어뢰(CHT-02D) 추진체 등을 근거로 천안함 침몰이 결국 북한의 소행으로 밝혀졌습니다.

천안함피격북한소행_1 천안함피격북한소행_2 출처 : KDAS

35 5.24 대북제재조치 실행

2010년 5월 24일

천안함 피격이 북한의 소행으로 밝혀짐에 따라 우리 정부는 북한의 추가적인 도발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도발에는 상응하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북한에게 분명하게 인식시키기 위해 강력하고 즉각적인 대북조치를 단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5.24 조치입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제외 방북 불허, 남북 교역 중단, 대북 신규 투자 금지, 북한 선박의 우리 해역 운항 불허, 대북 지원사업의 원칙적 보류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524조치 출처 : e영상역사관

36 연평도 포격 사건

2010년 11월 23일

북한은 2010년 11월 23일, 우리 영토인 연평도에 대한 포격 도발을 감행하였습니다.
북한은 연평도내의 군부대뿐 아니라 민가를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포격을 자행한 것인데요.
이 포격 도발로 우리 해병 2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민간인은 2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또한 건물 133동이 파손되면서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되었습니다.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은 6·25 전쟁 이래 한국 영토에 대한 북한의 첫 번째 공격이라는 점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는 점에서 한반도 평화를 근저에서 파괴한 매우 중대한 도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평도포격사건 출처 : KDAS

37 북한 제3차 핵실험 실시

2013년 2월 12일

북한은 2013년 2월 12일 1, 2차 핵실험을 실시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또 다시 3차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미국, 중국 등 국제사회의 비난이 이어졌는데요.
유엔 안보리는 결의안 2094호를 가결하여 북한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를 가하기로 했으며 중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북한의 핵실험을 규탄하고 대북제재에 동참했습니다.

북한3차핵실험실시_1 북한3차핵실험실시_2 출처 : KDAS

38 북한 제4차 핵실험 실시

2016년 1월 6일

북한은 2016년 1월 6일 3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감행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4차 핵실험을 단행했습니다.
국제사회는 유엔 안보리를 중심으로 보다 강력한 대북제재 방안을 논의했는데요.
유엔 안보리가 2016년 3월 2일 채택한 대북제재 결의 2270호는 비군사적 조치로는 가장 강력하고 실효적인 제재로 평가됩니다.
특히, 한국은 북한의 4차 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한 대응 조치 일환으로 개성공단 가동을 잠정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북한4차핵실험실시_1 북한4차핵실험실시_2 북한4차핵실험실시_3 출처 : KDAS

39 개성공단 가동 중단

2016년 2월 10일

남북협력과 남북경협의 대표적인 사례인 개성공단은 2016년 중단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연이은 장거리 로켓 발사에 대응해 2월 10일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고, 다음 날 북한은 공단 폐쇄와 남측 자산 동결, 남측 인원 추방으로 응수했습니다.
갑작스러운 공단 폐쇄로 우리 기업들이 입은 피해는 막대했는데요.
이렇게 가동이 중단된 개성공단은 현재까지도 멈춰선 상태입니다.

개성공단 가동 중단 출처 : KDAS

40 북한 5차 핵실험 실시

2016년 9월 9일

북한은 2016년 9월 9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5차 핵실험을 단행했습니다.
3년 주기로 실시하던 핵실험을 8개월 만에 실시한 것과 5차 핵실험이 상당한 위력을 표출했다는 점에서 북한이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 보유하고 실전 배치에도 한 층 가까워졌다는 관측이 제기됐습니다.
이에 국제사회는 추가 제재 조치를 담은 유엔안보리 결의안 2321호를 결의했습니다.

북한5차핵실험_1 북한5차핵실험_1 출처 : KDAS

41 북한 6차 핵실험 실시

2017년 9월 3일

북한은 2017년 9월 3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6차 핵실험을 강행했습니다.
북한의 6차 핵실험은 2016년 9월의 5차 핵실험 이후 1년 만이자, 문재인 정부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첫 핵실험입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6차 핵실험에 대응해 ‘대북 제재 결의 2375호’를 채택합니다.

북한6차핵실험_1 북한6차핵실험_2 북한6차핵실험_3 출처 : KDAS

남북관계 전환기

2018~

42 평창 동계올림픽 남북 공동 입장과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2018 2월 9일 ~ 2월 25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을 20일여 앞두고 남과 북은 극적으로 개회식 공동 입장과 단일팀 구성에 합의합니다.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이 종합대회 최초 남북 단일팀으로 구성됐는데요.
짧은 시간 ‘하나의 팀’을 이룬 이들로 인해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열린 평창올림픽은 올림픽 정신에 부합한 ‘평화올림픽’의 의미를 더하게 됐습니다.

평창동계올림픽남북단일아이스하키_1 평창동계올림픽남북단일아이스하키_2 출처 : KDAS

43 4.27 남북정상회담

2018년 4월 27일

2018년 4월 27일, 대한민국 역사상 세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 남측 '평화의집'에서 열렸습니다.
사상 처음 북한 최고지도자가 남측 땅을 밟았고 남북 정상은 손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나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배석자 없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고 나란히 단상에 서서 평화시대의 개막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됐습니다.
두 정상은 남북정상회담을 마친 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공동 발표했는데요.
판문점선언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 실현’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2018427남북정상회담 출처 : KBS News

44 스웨덴 세계탁구선수권 여자 단체전 단일팀 구성

2018년 4월 29일 ~5월 6일

스웨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 대회 여자 단체전에서 남북 단일팀이 구성됩니다.
준결승에서 일본의 벽에 막혔지만 남북의 출전 선수 전원이 시상대에 올라 동메달을 목에 걸고 기쁨을 함께했습니다.

스웨덴세계탁구선수권단일팀 출처 : 연합뉴스

45 5.26 남북정상회담

2018년 5월 26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꼭 한 달 만에 남북 정상은 판문점 북측 지역인 통일각에서 2018년 2차 정상회담을 열었습니다.
5월 25일 오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일체의 형식 없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고, 문 대통령이 흔쾌히 수락하며 성사됐는데요.
전격적으로 열린 이 회담에서 남북 정상은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남북 정상은 한반도의 비핵화, 항구적 평화체제를 위한 여정은 결코 중단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이를 위해 긴밀히 상호 협력하기로 하였습니다.

2018년 5월 26:5.26 남북정상회담 출처 : KBS News

46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2018년 6월 1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사상 최초로 북미 정상회담을 열었습니다.
북미 정상 간의 회담이 이뤄진 것은 1953년 분단협정 이후 65년 만인데요.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체제 안정을 제공하기로 약속했고,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약속을 재확인했습니다.
북미 정상회담은 새로운 미래를 여는 역사적인 행사였지만 공동성명에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CVID)가 명기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지적됩니다.

싱가포르북미정상회담 출처 : 연합뉴스

47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단일팀 출전

2018년 8월

남북은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3개 종목에 남북단일팀을 보내기로 합의합니다.
농구, 카누, 조정 종목에서 남북이 한 팀을 꾸렸는데요.
남한도 북한도 아닌 ‘코리아’로 출전한 단일팀은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로 획득하며 종합순위 28위를 기록했습니다.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출처 : KBS News

48 2018 남북정상회담 평양

2018년 9월 18일~20일

2018년 9월 18부터 3일간 북한의 평양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세 번째 정상회담이 열립니다.
한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도 2000년 김대중,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로 이뤄졌는데요.
두 정상은 비핵화 등 군사적 긴장 완화 조치는 물론 철도·도로 구축 등 남북경제협력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된 ‘9월 평양공동선언’을 발표합니다.
또 남북 정상의 합의문 서명 직후에는 남측 송영무 국방장관과 북측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상이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에 서명합니다.
9월 19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15만 평양 시민들을 상대로 공개 연설을 합니다.
방북 마지막 날인 9월 20일에는 남북 정상의 백두산 방문이 성사됐는데요.
백두산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아 올린 장면은 회담의 백미로 꼽힙니다.

평양공동선언 출처 : 연합뉴스

49 경의선ㆍ동해선 철도ㆍ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

2018년 12월 26일

남북 간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사업의 시작을 알리는 착공식이 2018년 12월 26일 개성 판문역에서 열렸습니다.
남북이 철로를 연결하게 되면, 한반도종단철도(TKR)가 완성되지요.
이 철도가 연결된다면 중국, 몽골횡단철도 등을 통해 유럽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착공식_1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착공식_2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착공식_3 출처 : KDAS

50 남북미 정상 판문점 회동

2019년 6월 30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 그리고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19년 6월 30일 사상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회동을 가졌습니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판문점 군사분계선 앞에서 만나 군사분계선 북측으로 함께 이동했습니다.
이로써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땅을 밟은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됐는데요.
이후 다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으로 이동한 두 정상은 자유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문재인 대통령과 남북미 판문점 회동을 엽니다.
북미 정상 간 단독 회담이 끝난 후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실무협상 재개를 공식화했습니다.

2019년 남북미 정상 판문점 회동 출처 : KBS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