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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1차 남북정상회담 추진 과정

1차 남북정상회담 추진 과정

2000년 6월 1차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것은 그동안 간헐적이긴 하나 꾸준히 진행됐던 남북 당국간 대화와 냉전 종식 등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한반도 주변 정세의 호전에 힘입은 것이었다.

7·4공동선언에서 베를린 선언까지

1972년 남북은 7·4 공동선언을 발표, 국내는 물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앞서 이뤄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비밀 방북 결과였다.
물론 그 이전에 적십자회담 등 민간 차원의 대화는 이미 물꼬를 텄지만, 당국간, 그것도 대통령 특사가 평양을 방문해 공동선언을 내놓은 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변화였다.
그러나 이 선언은 남북 양측에 의해 각각 보다 강력한 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남북관계는 기대만큼 진전시키지 못하는 결과를 빚었다.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돼 성사직전까지 갔던 것은 1994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의 회담이 역시 비밀리에 추진돼 일정까지 잡는데 성공했다. 남북이 1994년 7월25일부터 27일까지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던 것. 냉전종식과 소련 동구권의 와해 등 국제사회의 격변으로 한반도 정세도 크게 바뀌었고, 그만큼 냉전의 벽도 엷어진데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회담 개최를 17일 앞둔 7월 8일 오전 2시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쳑사상 첫 정상회담이 될뻔 한 김영삼-김정일 회담은 무산됐으나 이런 움직임은 남북정상회담이 무르익어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북한에는 김정일 체제가 들어섰고, 한국에서도 정권교체가 이뤄져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 포용을 기조로 하는 를 '햇볕정책'을 내놓고 이를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적극적인 대북 화해 제스처는 베를린 선언이었다. 2000년 3월9일 베를린에서 발표한 김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은 ▲남북당국자간 직접대화와 협력 ▲한반도 냉전종식과 평화정착 ▲이산가족 상봉문제 적극 호응 ▲남북 특사교환 등 4개 항의 대북제안을 담은 것으로 북한에 구체적인 화해의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

베를린 선언은 남북간의 교감 속에서 발표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2월 중순 남북 실무팀의 접촉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측에서는 관계부처 실무팀 3, 4명이, 북측에서는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의 관계자들이 각각 나서 접촉을 이어갔다.

베를린 선언 직후인 3월15일, 김대중 대통령은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을 관저로 불러 비밀리에 대북한 특사 임무를 부여했다. 박재규 통일부장관이 나서면 비밀을 지킬 수 없다는 이유였다. 비밀 특사가 된 박지원 장관은 3월17일, 22일, 4월8일 세 차례 중국을 방문,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 접촉했다.

실무팀이 사안을 정리하고 합의를 해 오면 박 장관과 송 부위원장이 확인하는 형식으로 접촉이 이뤄졌다. 눈여겨 볼 대목은 3월의 접촉과 마지막 접촉 간에 시차가 다소 있다는 점. 이는 북측이 무리한 요구를 해 와 회담이 난항을 겪었음을 입증한다. 북측은 당초 남측에 보안법 철폐 등 무리한 전제조건을 요구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회담 성사는 갑작스레 이뤄졌다. 4월7일 북측이 남측 제의를 수용하겠다면서 협상을 요구한 것. 이에 따라 4월8일 베이징에서 박 장관과 송 부위원장의 접촉이 이뤄졌고, 3시간 25분 간의 회담 끝에 양측은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문에 서명한다. 이로써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1차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4월10일 박재규 통일부장관과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은 정부중앙청사 통일부 회의실에서 내외신 기자회견 형식으로 남북정상회담 개최 사실과 일정을 공식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제16대 총선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남북정상회담개최의 정략적 이용이라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대목이다.

1차 남북 정상회담 추진 일지

2000년 이전
2000년 이전
1972년 7월 4일 7·4 남북공동선언 발표(이후락 중앙정보부장 평양 비밀 방문으로 성사, 최초의 남북 당국간 대화)
1994년 7월 25일 ~ 27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 남북정상회담 예정됐으나 김 주석의 돌연한 사망으로 무산
2000년
2000년
2월 중순 한국측 관계부처 실무팀 3,4 명과 북한 아태평화위, 조국평화통일위 등 관계자들 접촉 시작
3월 9일 김대중 대통령,
ㆍ남북당국자간 직접대화와 협력
ㆍ한반도 냉전종식과 평화정착
ㆍ이산가족 상봉문제 적극 호응
ㆍ남북 특사교환 등 4개 항 대북제안 담은 베를린 선언 발표
3월 17일 박지원 장관 상하이에서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 첫 접촉
3월 22일 베이징에서 박 장관 송 부위원장 2차 접촉
4월 7일 북측, 8일 베이징 회담 제의
4월 8일 박 장관과 송 부위원장 3차 접촉 갖고 3시가25분 만에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서 서명
4월 10일 박재규 통일부장관,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 정부중앙청사 통일부 회의실에서 내외신 기자회견 형식으로 남북정상회담 공식 발표
6월 13 ~ 15일 평양에서 제1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제1차 남북정상회담의 성과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는 항상 '역사적인'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이는 남북 정상이 만났다는 것 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제1차 회담의 성과는 6.15 남북 공동선언에 축약돼 있다. 그 성과는 공동선언 이후 구체화 과정을 거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업으로 진행돼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도 있고, 난항을 거듭하면서 답보 상태에 있는 것도 있다. 남북관계의 전반적인 심화와 확대라는 결과물도 6.15 남북공동선언의 성과이다.

공동선언에 축약된 성과

6.15 공동선언은 전문과 5개항,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을 규정한 말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합의사항 5개항은 다음과 같다.

1.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2. 연합제(남측), 낮은 단계의 연방제(북측) 방향으로 통일 지향
3. 인도적 문제 해결(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및 장기수 문제 해결)
4. 경제교류 활성화와 신뢰구축
5. 합의사항 실천을 위한 당국간 대화 개최

6.15선언 이후의 대표적 성과

6.15 공동선언의 직접적인 성과와 그로 인해 파생됐다고 할 수 있는 후속 조치의 대표적인 성과는 다음과 같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는 항상 '역사적인'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이는 남북 정상이 만났다는 것 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제1차 회담의 성과는 6.15 남북 공동선언에 축약돼 있다. 그 성과는 공동선언 이후 구체화 과정을 거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업으로 진행돼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도 있고, 난항을 거듭하면서 답보 상태에 있는 것도 있다. 남북관계의 전반적인 심화와 확대라는 결과물도 6.15 남북공동선언의 성과이다.

공동선언에 축약된 성과

6.15 공동선언은 전문과 5개항,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을 규정한 말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합의사항 5개항은 다음과 같다.

1.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2. 연합제(남측), 낮은 단계의 연방제(북측) 방향으로 통일 지향
3. 인도적 문제 해결(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및 장기수 문제 해결)
4. 경제교류 활성화와 신뢰구축
5. 합의사항 실천을 위한 당국간 대화 개최

6.15선언 이후의 대표적 성과

6.15 공동선언의 직접적인 성과와 그로 인해 파생됐다고 할 수 있는 후속 조치의 대표적인 성과는 다음과 같다.
이산가족 문제 ㆍ이산가족 상봉 계속
ㆍ이산가족 면회소 개설(합의 추진되고 있으나 답보 상태)
남북 경협 사업의 구체화 및 심화 ㆍ개성공단 사업
ㆍ경의선 동해선 철도 도로 연결사업
ㆍ남북 경공업·지하자원 협력사업
남북 당국간 대화 ㆍ장관급회담(2007년 6월초까지 21차례 개최돼 사실상 정례화됐다)
ㆍ경제협력추진위원회(각종 구체적 경협 사업 논의 및 추진)
ㆍ군사회담(군사실무회담, 장성급회담, 국방장관회담 등 각급 군사회담이 여러차례 개최돼 군사 신뢰관계를 축적하고 있다. 다만 국방장관회담은 단 한차례만 열려 전반적으로는 답보상태)

남북관계의 포괄적 성과

제1차 정상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냉전의 얼음을 깨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적십자회담, 이산가족 상봉 등으로 조금씩 물꼬를 터오던 남북관계를 당국간의 공식적인 관계로 격상시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 역사적·상징적 의미
남북 정상이 만나 악수를 함으로써 그동안 적대적인 벽을 치고 살았던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2. 상호 이해 증진
지속적인 당국간 대화와 민간차원의 교류는 상호 이해 증진과 신뢰 구축을 위한 토대가 되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인내의 결과물이다. 만약 북한이 좀더 전향적이고 열린 자세를 취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즉 그 성과는 훨씬 커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얼음이 일거에 다 녹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 조금씩 금이 가고 녹다보면 어느날 모두 녹아있을 것이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 (전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2000년 6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