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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A to Z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의 권력 장악

3대혁명소조

'3대혁명소조'를 무용으로 표현하는 북한무용수들

김정일의 권력 장악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조직이자 운동. 1973년 2월13일 김일성의 직접 지시로 만들어졌고, 그 해 9월 김정일이 조직의 총책임자가 된다.

‘3대혁명소조’란 “간부들을 잘 도와주어 그들이 보수주의, 경험주의를 비롯한 낡은 사상을 버리고 당이 요구하는 대로 일을 잘하도록 하며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을 더욱 힘있게 밀고 나가기 위한 중요한 임무를 맡고 인민경제 여러 부문에 파견된 준비된 당핵심들과 청년인테리들로 구성된 소조”를 말한다.

이들은 당 및 행정기관과 공안기관 등에 대해 파견돼 통제, 조정, 감독권을 행사하는 막강한 권한과 함께 주요 정보를 당 중앙에 직접 보고할 수 있는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므로 김정일은 권력의 말단에서부터 주요 기관에 이르기까지 직접 보고받고 지시할 수 있는 지휘계통을 갖게 된 셈이다. 이는 당 조직에 대한 효과적인 장악을 가능케 했고, 이것이 폭넓은 권력 기반으로 작동하게 됐다.

김정일의 권력 장악과정

1997, 군대사열하는 김정일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80년 10월 제6차 당 대회에서라고 할 수 있다.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것. 정치국 비서국 양대 조직의 직함을 갖게 됨으로써 사실상 정상급으로 올라섰고, 군사위원이 됨으로써 군 장악도 시작됐다.

1983년에는 중국을 방문해 정상급 대외 활동을 시작했고, 1986년부터는 중국 소련 등의 수뇌급과 연하장을 교환하기 시작했고, 1988년부터는 김일성의 활동에만 사용되는 '현지지도'란 용어가 김정일의 활동에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1990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위원장은 김일성), 1991년 인민군 최고사령관, 1993년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돼 군부과 국가 권력을 사실상 모두 장악했다. 물론 이 과정은 김일성의 확고부동한 지원과 후원으로 진행된 것이다.

유훈통치

이런 상태에서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다. 권력세습은 당연히 이뤄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독재국가에서 공식 후계자가 권력 승계에 성공한 예가 사실상 전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정일의 권력승계는 아직은 미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사망은 김정일 개인으로서는 정치생명의 위기이고, 북한으로서는 체제의 위기였던 것이다.

김정일은 이 위기를 '유훈통치'란 절묘한 방식으로 극복한다. 김일성의 카리스마를 그대로 살려 둠으로써 유일지배체제를 지속하면서 '효(孝)'라는 동양적 가치관을 결합시켜 체제의 결속을 다진 것이다. 유훈통치가 3년 동안 계속된 것도 한국의 전통적인 부모에 대한 '3년상(喪)'의 사고방식과 무관치 않다. 1997년 10월 로동당 총비서, 1998년 국방위원장 재추대 및 헌법 개정(제10기 최고인민회의 1차 회의) 등을 통해 김정일 정권은 마침내 공식 출범한다.

김정일에 대한 여러가지 호칭이 나타난 시기와 대표적 호칭

  • 1974년 '당 중앙'
  • 1975년 '유일한 지도자'
  • 1983년 '영도자', '최고사령관'
  • 1986년 '인민의 어버이'
  • 1987년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영도자', '백두광명성', '향도성'
  • 1991년 '또 한분의 걸출한 수령'
  • 1993년 ‘우리 당과 인민의 영명한 수령', '민족의 어버이', '인민의 지도자', '탁월한 군사 전략가', '강철의 영장'

김정일 정권 출범 후에는 최고사령관 동지, 장군님,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등의 호칭이 일반적

김정일의 리더십 - 인덕정치, 광폭정치, 선군정치

'인덕정치'와 '광폭정치'는 김정일의 리더십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사용되는 용어라 할 수 있고, '선군정치'는 군(軍)을 우선시하고, 군의 힘을 최대한 활용해 안보를 튼튼히 함은 물론 경제건설을 통해 국민 생활에 이바지한다는 통치전략이라 할 수 있다.

  • 인덕정치
    인덕정치란 용어는 1993년 언론의 "인덕정치가 실시되는 사회주의 만세"라는 기사에서 처음 나타났다.(로동신문 1993. 1.28) 이에 따르면 인덕정치란 "'정치의 주인'인 인민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모든 정치를 해 나가는 것"이며 (김정일이) "인민에 대한 위대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 인민을 위한 가장 훌륭한 정치를 베풀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 스스로도 1994년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라는 논문을 통해 인덕정치를 강조했으며 이후 인덕정치는 각종 보도 매체를 통해 본격적으로 선전되기 시작했다.
  • 광폭정치
    광폭정치란 용어는 인덕정치와 긴밀하게 연계된 개념이다. 북한측의 정의에 따르면 '광폭정치'란 "전체 인민을 한 품에 안아주는 정치"로서 "기본 군중 뿐만 아니라 가정 주위환경과 사회정치생활 경위가 복잡한 군중도 혁명의 영원한 동행자로 보고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는 정치"로 묘사된다. 결국 이것은 김정일의 지도 역량이 크고 대담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 선군정치
    김정일시대의 핵심 지도이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주체사상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사상의 바탕 위에 있는 실천전략이다. 군(軍)을 최대의 지지기반으로 최우선시하는 정책이지만 결국은 김정일로서는 조직이나 역량 면에서 북한에서는 그나마 군이 유일한 '가용자원'이라는 점에서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해된다.

김정일의 정책

김일성 사후 북한의 체제위기는 경제위기, 식량위기로 더욱 혹심했다. 아사자가 속출하는 극심한 식량난과 경제 위기 속에서 항일투쟁기의 '고난의 행군'이란 용어를 차용함으로써 주민 통합의 모티브로 삼았다. 결국 고난의 행군 종료를 선언한 2000년 이후에야 비로소 완전하고 확고한 김정일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정일은 이후 중국을 방문해 개혁개방의 현장을 살펴보고 "천지개벽"이란 소회를 밝혔고, 이런 일종의 '현장학습' 이후 신의주특구 계획(☞ 경제의 새로운 모색과 신의주 경제특구), 7.1 경제관리개선조치(☞ 7.1 경제관리 개선조치) 등이 잇따라 나왔다.

이른바 2차 북한 핵위기는 개혁개방의 모색과 함께 김정일시대 북한의 체제 유지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김일성 말년에 이뤄진 북미관계의 개선이 2000년 미국의 정권교체 이후 재구축기를 맞으면서 북한의 비밀 핵무기개발계획이 드러나면서 불거진 2차 핵위기는 김정일의 체제 유지를 걸고 벌이는 위태롭고 대담한 도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