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클로즈업 북한

2004년 금강산 신계사 복원

2018-09-13

ⓒ KBS News

올해 5월 22일, 부처님 오신 날에는 남북 관계 경색으로 중단됐던 남북공동 발원이 3년 만에 재개됐다. 부처님 오신 날 남북공동 발원문은 1997년 시작된 것으로 한국 불교계는 오랜 시간, 남북 동질성 회복의 장을 열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이 중 금강산 신계사는 남북 민간 교류의 성공적인 사례이자 통일을 위한 밑거름으로 2004년 복원 사업이 시작됐다. <통일을 향한 순간들>, 오늘은 ‘금강산 신계사 복원 사업’을 따라가 보자. 


519년 창건, 금강산 4대 사찰인 신계사

신라 법흥왕 6년인 519년, 창건된 신계사는 장안사, 유점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히던 절이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승군을 일으킨 민족의 성지였지만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석탑만 남은 폐사지였다. 이 같은 신계사를 분단 후 최초로 힘을 합쳐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로 한 남과 북은 2001년, 공동으로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2004년 4월 6일, 복구의 첫 삽을 떴습니다. 


폭격으로 석탑만 남은 신계사, 남북한 공동으로 복원에 나서

복원 공사는 한국이 자재 등 약 70억 원의 공사비를 지원하고, 북측은 주로 공사 인력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민족문화유산을 남북이 함께 발굴 조사하고 복원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신계사 복원은 순조롭게 진행되며 2004년 11월. 대웅전이 완성되는 첫 번째 결실을 맺었다. 

남한의 제정스님이 금강산에 상주한 가운데 기본적인 공사부터 단청, 문양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견해 차이. 유구를 발굴했을 때 생기는 해석의 차이 등을 극복하면서 2005년에는 만세루, 요사채, 산신각. 3개동의 전각과 삼층석탑 복원공사가 마무리됐고, 2006년에는 극락전, 칠성각, 나한전 등 7개동의 복원공사가 진행됐다. 서로의 마음과 땀이 어우러지고 남북의 목재, 돌, 흙이 하나로 모여 새롭게 태어난 신계사는 남북학자와 기술진이 옛 문헌을 대조해 가며 기둥과 들보, 서까래와 단청까지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한 끝에 2007년 10월 13일. 복원사업이 모두 끝내고, 낙성식을 봉행했다. 


착공 3년 6개월만에 장엄한 고찰의 옛 모습 되찾아

2004년 4월 착공 이후 3년 6개월간 진행해온 대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신계사는 14채의 전각이 세워져 장엄했던 고찰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낙성식 행사는 시작 무렵부터 비가 내렸지만 신계사의 웅장한 모습에 400여명의 참석자들은 찬사를 보냈다. 남북 불교의 역량을 결집해서 복원한 금강산 신계사는 반세기에 걸친 분단이 가져온 문화적 차이를 극복한 사례이자 민족 화해의 상징물로 다시 태어났다. 

특히 2006년, 북한이 1차 핵실험을 실시하는 등 북핵 문제로 인한 정세 변화 속에서도 복원사업은 일관되게 진행돼 남북에 화합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래서 남과 북은 신계사 준공을 계기로 내금강 유적들도 복원하는 방안을 타진하고, 불교계의 교류와 협력을 발전시켜나가기로 했다. 그렇지만 이후 상황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남북 불교 교류와 민족 화해의 상징물인 신계사

2015년 10월 15일. 금강산에서 목탁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계사에서 남북한 불교도 100여 명이 모여서 낙성 8주년을 기념하는 법회를 연 것으로 이 행사는 오랜만에 열린 대규모 남북 민간행사였다. 2007년 낙성식 이후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이 발생하는 등 남북 관계가 경색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종교 교류 활동도 위축됐기 때문이다. 

‘신계사 낙성 8주년 기념 합동법회’를 봉행하면서 신계사는 다시, 남북 화합의 상징으로 급부상했지만 한반도의 긴장 국면 속에서 이후의 행사도, 교류도 활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남북 불교 교류와 민족 화해의 상징물인 신계사. 남과 북이 힘을 합쳐 처음으로 복원한 사찰이 한반도 평화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올해, 다시 예전처럼 많은 이들이 찾으며 통일을 염원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