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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잽 - 김언수

2022-09-06

ⓒ Getty Images Bank

“링이건 세상이건 안전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지.

툭툭, 잽을 날려 네가 밀어낸 공간만큼만 안전해지는 거지.

거기가 싸움의 시작이야.

상대방은 화가 나 있어. 네가 자기 땅에 함부로 들어왔으니까.

상대방은 아주 뜨거워졌지, 하지만 너는 차가워.

너는 그저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가져오고 있는 중이니까.

상대방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여전히 방울토마토를 가볍게 가져올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거지.

싸움은 그렇게 잔인한 거야.

어때? 너는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못 되면요?” 


“홀딩이라는 좋은 기술도 있지.

 좋든 싫든 무작정 상대를 끌어안는 거야.

 끌어안으면 아무리 미워도 못 때리니까.

 너도 못 때리고 그 놈도 못 때리고 아무도 못 때리지.” 


- 방송 내용 중 일부 



“그나저나 그 녀석을 KO시켰나?”


“KO까지는 못 시켰지만, 뭐 판정승 정도는 거두었다고 생각해요.”


“에이 싸움에 판정승이 어디 있어.

싸움은 KO 시키거나 KO 당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는 거지”


나는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고

내 주먹을 맞고 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누구인지 잠시 생각했다.



# 인터뷰. 방민호 문학평론가

이 소설에서는 권투는 인생과 같은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맞상대해야 하는 어떤 거대한 적이 있을 때 이 소설 속에서는 이 학생의 삶의 자유에 위해를 가하는 어떤 세력이 있는 것이에요. 학교라는 제도, 동상으로 상징되는, 또 실리카겔 같은 선생님 이들을 상대를 해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거대한 메커니즘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잽과 홀딩을 통해서 인생을 사는 법 먼저 자기 자신의 공간, 삶의 이유를 확보하고 경계하면서 마지막 한방으로 무너질 때까지 끈기를 가지고 자기 삶을 지켜나가라 라고 하는 교훈, 이것을 권투에 빌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죠.



나는 요즘 활어 트럭 운전을 하고 있다.

보수도 시원치 않고 주로 밤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일이라

그리 좋은 직업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직업도 아니다.

일은 좀 고되지만 다른 직업처럼 상사에게 간섭도 받지 않고

또 차를 운전하면서 음악도 들을 수 있다.


서른쯤 되면 자잘한 일들로 너무나 바빠져 버려서 

다이너마이트를 한 트럭 가져다줘도

세상을 폭파시키는 일 따위에는 관심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잽 같은 건 날릴 생각도 못한다.

매일매일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있는 것 같은데 

막상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주먹을 내밀지 않고 있는 고요한 세상이어서

도대체 어디가 잽을 날려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작가 김언수 (부산광역시, 1972~ )

    - 등단 :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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