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Go Top

문화

만무방 - 김유정

2022-11-15

ⓒ Getty Images Bank

응칠의 가족은 집에서 도망 나와 밥을 빌어먹고 다녔고

그마저 힘들어지자 결국 살길을 찾아 헤어졌습니다.


그 후 이러 저리 떠돌던 응칠은

절도와 도박 전과 4범이 됐는데요, 

그렇게 집도 땅도 가족도 없이 떠돌던 응칠이

동생 응오가 사는 동네에 들어온 것은 한 달 전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혈육인데다 오래 못 봐서 그리웠던 건데요,

모처럼 만난 응오도 형편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 방송 내용 중 일부 



응오는 진실한 농군이었다.

나이 서른하나로 무던히 철났다하고 동리에서 쳐주는 모범 청년이었다.

그런데 벼를 베지 않는 것이다.

지주든 혹은 그에게 장리를 놓은 김참판이든 뻔질 찾아와 벼를 베라 독촉하였다.


“계집이 죽게 됐는데 벼는 다 뭐지유” 


응오의 아내가 지금 사정이매 틈은 없었다 하더라도 

돈이 놀아서 약을 못 쓰는 이판이니 벼라도 털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왜 안 털었던가....


한 해 동안 알뜰히 가꾸던

그 벼를 걷어 들임은 기쁨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지주에게 도지를 제하고, 장리쌀을 제하고, 색초를 제하고 보니

남는 것은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땀이 있을 따름.

그것은 슬프다 하기보다 끝없이 부끄러웠다.

같이 털어주던 동무들이 뻔히 보고 섰는데

빈 지게로 덜렁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건 진정 열적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참다 참다 응오는 눈에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 인터뷰. 전소영

일제강점기에 가혹한 지주-소작인 제도 안에서 농민들은 본업인 농사로 삶의 희망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도박이라는 불법수단으로 일확천금을 노리기도 했고 이제 그런 모습도 작중에 드러나는데요. 그런 차원에서 작중 응칠이와 응오는 사실 다 만무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 뿐만이 아니라 당장 하루를 버티기 위해서는 만무방으로 사는 것이 차라리 나은, 내일이 없는 조선 농민 모두가 바로 만무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뜸 몽둥이는 들어가 그 볼기짝을 후려갈겼다.


아우는 모로 몸을 꺾더니 시나브로 찌그러진다.

뒤미처 앞 정강이를 때렸다.

등을 팼다.

일어나지 못할 만큼 매는 내렸다.

체면을 불구하고 땅에 엎드려 엉엉 울도록 매는 내렸다.


홧김에 하긴 했으되 그 팔을 보니 또한 마음이 편할 수 없다.


침을 퉤, 뱉어 던지곤 팔자 드센 놈이 그저 그러지 별수 있냐.

쓰러진 아우를 일으켜 등에 업고 일어섰다.

언제나 철이 날는지 딱한 일이다.

속 썩는 한숨을 후- 하고 내뿜는다.

그리고 어청어청 고개를 묵묵히 내려온다.




작가 김유정 (강원도 춘천, 1908.1.11.~1937.1.29)

    - 등단 : 1933년 단편소설 [소낙비] 

Close

우리 사이트는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와 다른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계속 이용함으로써 당신은 이 기술들의 사용과 우리의 정책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