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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마른 꽃 - 박완서 (1)

2023-05-02

ⓒ Getty Images Bank

호텔 지하상가에 있는 친구네 보석상에 별 볼일 없이 자주 드나들 때는

물론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였다.

젊은 날을 돌이켜보면 어느 만큼은 대견해하고 어느 만큼은 허무해하던 때였으니

마흔은 훨씬 넘어서였을 것이다.

허무해지기 시작하면 꽤 괜찮게 자란 아이들도,

실력을 인정받는 간부사원이 된 남편도 시들해졌고,

시들해지기 시작하면 손끝 발끝이 저리도록 기운이 빠졌다.


느닷없이 돈푼께나 있는 친구가 보석상을 차리고,

겨우 사는 내가 아무것도 안 사면서 

보석상을 뻔질나게 드나든 것도 그런 허전한 심사와 무관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때 늙는 일 밖에 안 남은 나이를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 방송 내용 중 일부 



오 분 전쯤에 버스에 올라 타 창가에 앉았다.

그는 출발 직전에 올라탔다.


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가 카키색 트렌치 코트를 벗어서 시렁에 얹으려는 찰나

살짝 뒤집힌 옷자락에서 런던포그 상표가 드러났다.

세련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그와 함께 바바리 자락에 찬바람을 묻히고

그럴 듯한 바에 들어가 양주를 한잔씩 하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이상해지는 것은 

암만해도 그가 끼고 있는 아쿠아마린 반지와 상관이 있을 터였다.

아니면 꼭 그랬으면 싶은 바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 인터뷰. 전소영

작중에서 주인공은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조카 부부로 인해서 자기의 존재나 역할의 의미가 퇴색되었다고 자조를 합니다. 마치 거추장스러워진 한복처럼 자기가 이렇게 변했다고 느끼죠. 그런데 낯선 남자와 예기치 않게 만나면서 다시금 활기를 얻고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의 역할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고 그로서 삶에 다시금 의미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주인공 모습이 보여주는 것이죠.



밤공기가 냉랭했다.

그가 코트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나는 마다하지 않고 순순히 그 안에서 몸을 작게 웅숭그렸다.

나이 같은 건 잊은 지 오래다.


벗어놓았던 옷처럼 익숙하고도 눅눅한 내 집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그의 명함을 들여다 보았다.

아무런 직함 없이 이름 석자하고 집과 사무실 전화번호만 들어있는 간결한 명함이었다.

내가 그에 대해 뭘 안다고 나는 그게 그답다고 여겨져 더욱 호감이 간다. 




작가 박완서 (경기도, 1931.10.20.~2011.01.22.)

    - 등단 : 1970년 장편소설 [나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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