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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소를 타고 피리 부는 소박한 재상, 충남 아산의 ‘고불 맹사성’

2013-03-22

소를 타고 피리 부는 소박한 재상, 충남 아산의 ‘고불 맹사성’
아산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우리나라 핵심 산업이 자리한 알토란 같은 동네다. 세종대왕을 비롯해 세조, 현종, 숙종 등 여러 임금이 온궁을 짓고 휴식을 취했으니 아산 온양온천은 1천3백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성웅 이순신이 삶의 토대를 닦은 곳 또한 아산이며 세종을 도와 조선의 과학을 발전시킨 장영실의 묘가 아산에 있다. ‘토정비결’로 잘 알려진 토정 이지함 역시 아산 출신으로 아산현감을 지냈고, 구한 말 개화파의 거장 김옥균 선생 유허와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가 있으니 아산은 참으로 가진 것과 이야기가 많은 동네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 중 소를 타고 다니며 피리를 불던 고불 맹사성을 빼 놓을 수 없다.

맹사성과 무명선사의 선문답

맹사성은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1386년(고려 우왕 12년)인 열아홉에 장원급제를 하여 스무 살에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되었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한 고을을 다스리는 수장이 되니 자만심이 생겼다. 늙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자기에게 머리를 숙이니 자신도 모르게 우쭐한 마음이 생겨 차츰 방자하고 독선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맹사성은 학문과 덕망이 높기로 소문난 무명선사를 찾아갔다. 그런 분에게 인정을 받고 싶기도 하고 또 혈기 왕성하던 때라 그의 학문을 시험해 보고 싶은 객기도 있었음직하다. “스님이 생각하기에, 이 고을 수장으로서 내가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고 보오?” 무명 선사가 대답했다. “그건 어렵지 않지요.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그러자 맹사성이 거만하게 되물었다. “그런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이거늘,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온 내게 해줄 말이 고작 그것뿐이오?” 하며 화를 내고 일어서려 하자 무명 선사는 녹차나 한 잔하고 가라며 그를 붙잡았다. 맹사성은 못 이기는 척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스님은 그의 찻잔이 넘치도록 자꾸만 차를 따르는 게 아닌가.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이 다 젖었습니다.” 맹사성이 소리쳤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차를 따르는 것이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 적시는 것을 알면서,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맹사성은 얼굴이 화끈거려 정신없이 일어났다. 도망치듯 나가려다 그만 문틀에 이마를 부딪치고 말았다. 머리가 아파 쩔쩔매고 있는데 등 뒤에서 스님이 나지막히 말을 건넸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지요. 우리가 돌덩이에 불과한 불상에게 몸을 숙이는 것도 세상을 겸손하게 살아가기 위함이라오. 허허허” 맹사성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호를 고불(古佛)이라 고치고 그 이후로는 남녀노소·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예로써 대하며 청렴한 삶을 살았다한다. 그가 50년이라는 세월동안 청백리의 이미지를 간직한 것은 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다른 사람과 스스로에게 겸손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최영 장군의 집? 맹사성의 집?

꼬불꼬불 시골길을 달려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도착했다. 돌담 품에 안긴 집 한 채가 소담스럽다. 본래 이곳은 고려 말의 최영 장군이 살던 집이다. 맹사성이 다섯 살 때쯤 아버지인 맹희도가 온양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최영의 이웃집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늠름했던 맹사성의 사람됨을 눈여겨본 최영이 맹사성을 손녀사위로 삼고 집까지 물려준 것이다. 생가 입구에는 수령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늠름하게 서있다. 맹사성이 직접 심었다고 전하는 은행나무는 아직도 해마다 은행을 다섯 가마씩 낸다.

달빛 가득한 밤에 들려오는 퉁소 가락

맹사성의 고택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ㄷ자형 평면집으로 중앙 2칸에 커다란 대청이 있고 좌우에 온돌방을 각각 두고 있다. 음률에 밝은 맹사성은 퉁소를 즐겨 불었다고 한다. 처마와 마루와 마당이 온통 달빛에 젖어 있을 보름날에 대청에 앉아 배방산 줄기를 바라보며 퉁소를 부는 고불 맹사성의 모습을 그려본다. 퉁소의 맑은 가락을 사랑한 사람이라면 청백리가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뒤쪽에는 세덕사가 별도의 담장을 품고 있다. 세상에 덕을 베푼다는 뜻의 세덕사에는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 아버지 맹희도, 그리고 맹사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단청을 올리지 않은 정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살펴 볼만하다.

세종과 황희와 맹사성

맹사성 생가는 특이하게도 이중 돌담이 둘러져 있다. 생활 공간을 아우르는 안쪽 담장과 외부공간을 차단하는 바깥외담인데 바깥 담장의 일각문을 나가면 맹사성이 황희, 권진과 어울려 국사를 논의하고 민생을 살폈다는 구괴정이 있다. 각기 느티나무 세 그루씩을 심으니 모두 아홉 그루를 심었다고 해서 구괴정이다. 구괴정이라는 현판은 정자 안쪽에 있고, 입구 바깥에는 삼상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세 정승이 국사를 논의하던 곳이라는 뜻이다. 맹사성은 사람됨이 소탈해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고 한다. 출타할 때에는 소(牛)타기를 즐겨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소를 타고 옥피리 불기를 즐겼는데 ‘소를 타는 것은 더디고자 함이다.’고 했으니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한번 쯤 생각해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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