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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사찰 나들이, 성북동 길상사

2013-03-08

사찰 나들이, 성북동 길상사
산문집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스님이 2010년 3월 11일 오후 1시52분께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 세수 78세이며 불가에서 속인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해부터 세는 나이인 법랍은 55세. 13일 11시 송광사에서 다비식. 법정스님은 폐암으로 투병했고 2009년 연말에는 제주도에서 요양했으나 2010년 병세가 악화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왔고, 입적 직전에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로 옮겼다. 법정스님은 자신의 건강상태를 의식한 듯 2008년 11월에는 길상사 소식지에 실었던 수필들을 모아 수필집 '아름다운 마무리'를 출간했다.

맑고 향기로운 법정스님의 일생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스님은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1955년 오대산을 향해 떠났지만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선학원에서 당대 선승인 효봉 스님을 만나 대화하고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았다. 이튿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시작한 스님은 1959년 2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스님은 1975년 10월부터는 17년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았다. 불일암 시절 초반인 1976년 4월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를 출간한 이후 불교적 가르침을 담은 산문집을 잇따라 내면서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법정 스님은 불교계의 현실 참여가 전무하다시피했던 1970년대에 함석헌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민주화운동에 나서기도 했고, 지난해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과도 깊은 교분을 나누기도 했다. 1994년부터는 순수시민운동단체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마음과 삶을 맑히는 운동을 펼치며, 고독한 수행 생활을 해왔다. 법정스님은 1996년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기부받아 1997년 길상사를 개원한 후에는 정기적으로 대중법문을 들려줬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무소유', '영혼의 모음', '서 있는 사람들', '말과 침묵', '산방한담', '텅빈 충만', '물소리 바람소리' 등이 있다.

길상사와의 인연

길상사는 원래 1960~80년대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고급요정으로 유명했던 대원각이었다.
이 요정이 어떻게 길상사라는 절이 되었느냐에 대한 사연은 요정의 소유주였던 김영한 여사와 시인 백석과의 애틋한 인연에서 비롯된다. 김영한은 어릴 적 집안 사정으로 16세에 기생이 되었다. 그러던 중 시인 백석이 26세, 김영한이 22세 때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서로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백석의 부모가 둘 사이를 갈라 놓기 위해 백석을 다른 여자와 억지로 결혼을 시켰다. 백석은 도망쳐서 김영한에게 돌아와 함께 만주로 도피할 것을 권유했지만, 김영한이 거절을 했다고 한다. 결국 백석 혼자 만주로 떠나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남북이 분단됨으로써 두 사람은 영영 이별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생전의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 때문에 하루 동안 일절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백석이 그리우면 줄담배를 피워댔는데 이 때문에 기어이 폐암에 걸렸고,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때 김영한은 무소유를 설법하는 법정스님에게 감화하여 7000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 등 1천억원대의 부동산을 길상사 전체를 법정스님에게 준다. 무소유를 주장하다 소유하게 생긴 법정스님.. 여러번 거절하다 시민들에게 돌려줄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이 평생 운영한 요정 대원각을 시주하여 1997년 오늘날의 길상사가 되었고, 법정스님으로부터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현금 2억원을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다. 그리고 길상사가 설립된지 2년 후인 1999년, 김영한은 평생동안 한 사람을 사랑하며 기리다가 그의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우리 문학사와도 인연이 깊은 사찰

일반적으로 사찰의 큰 법당은 대웅전인데 길상사는 왜 극락전일까. 그 이유를 알아보니...
길상사는 故김영한여사의 시주로 창건된 사찰로 시주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새롭게 절이 된 그 터가 청정한 부처의 세계로 바르게 다져질 때까지 우선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는 관례에 따라 극락전을 우선법당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절과 달리 단청이 없는 이유는 법정스님이 도심의 사찰은 단청이 없이 나뭇결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극락전 옆으로 난 작은 문을 지나면 계곡을 낀 작은 숲이 이어진다. 길상사는 보통의 사찰처럼 숲속을 지나 사찰의 경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내에 작은 숲속을 품고 있다. 일주문 안과 바깥의 세상이 분명히 구분된다. 일주문을 나서면 도심속 주택가가 되고,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 숲속이 된다.

길상사를 즐기는 방법

숲이 우거진 계곡길을 따라 곳곳에 벤치가 놓여 있다. 그래서 삼삼오오 모여 좋게 표현하자면 '담소'를 나누는 방문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 모습만 보자면 이곳이 스님들이 수도를 하고 있는 절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길상사가 문화행사도 자주 열고 해서 그런지 몹시 대중적인 성향의 절인 듯 했다. 계곡위에 나무로 지어진 방 한 칸짜리 작은 집들은 대원각 시절에 쓰였던 건물로 현재는 스님들의 거처라고 한다. 계곡 옆으로 쌓여진 석축의 형태가 일률적이지 않고, 들쭉날쭉 주변경관과 잘 어울리게 자연스럽게 쌓여져 있었다. 법정스님이 길상사 개원식에서 길상사는 결코 불교신자들만을 위한 사찰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는 작은 공원이자, 사색의 오솔길이며, 마음의 쉼터요, 기도처가 되길 바라셨다고 한다. 길상사를 돌면서 절 답지 않은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법정스님의 그 바람이 잘 지켜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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