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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복사꽃처럼 볼 붉은 18세 소녀, 유관순

2013-03-01

복사꽃처럼 볼 붉은 18세 소녀, 유관순
대한민국 국민치고 유관순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들도 모두 아는 유관순은 18세에 생을 마감했다. 나는 그 때 무엇을 했을까? 천안으로 향하며 생각해본다.
‘한국의 잔 다르크’ ‘독립운동의 꽃’으로 불리는 유관순의 흔적을 따라 그녀가 살았던 곳부터 가보자. 산수유와 하얀 목련이 꽃망울을 터트리는 봄날의 천안은 참으로 아름답다. 유관순 생가 역시 뒤뜰에 핀 산수유 꽃봉오리가 대견하고 고맙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조그맣고 노란 꽃송이는 매서운 억압과 시련을 격어내고 광복을 맞은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듯하고 이는 유관순 같은 당대 인물들의 희생이 밑받침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미안하고 짠하다.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든 유관순

유관순 생가는 작고 아담한 초가집의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 생가는 아우내 만세 운동 당시 일본관헌들에 의해 전소되었기에 1991년 12월 30일 복원하였다. 생가 안방에는 유관순의 어머니(이소제)와 숙부(유중구), 교사(김구응)와 마을 유지(조인원) 그리고 유관순의 아버지(유중권)가 모여앉아 회의를 하고 있는 모형이 있다. 건넌방에서는 유관순 열사가 동생들과 태극기를 만들고 있다. 이번에는 유관순 열사 기념관으로 가서 유관순의 흔적을 한 번 살펴보자.

민족자결주의, 그것이 독립만세운동에 불을 붙이다

유관순 기념관으로 들어가기 전 광장 한쪽에는 태극기를 들고 힘차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유관순 동상이 서있다. 당시의 느낌이 들 정도로 장엄한 모습이다.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의 3남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해 가산을 털어 흥호학교를 세울 만큼 계몽 운동가였고 민족주의자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던 유관순은 1916년 감리교 공주 교구의 미국인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교비생으로 입학해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계획이 추진되었고, 국내에서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기 추진되었다. 그렇다면 갑자기 만세운동을 하게 된 이유가 뭘까? 국제 정세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1월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는 기대감 이 작용하며 만세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독자적으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던 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가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며 함께 할 것을 연락받았다. 하여 대대적인 연합 전선이 결의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어 민족대표들의 협의를 거친 끝에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에서 2만 1천여 매가 인쇄되었다. 거사일자는 3월 3일의 광무황제 국장일과 3월 2일의 일요일을 피하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유관순도 6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탑골공원을 시작된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이 학교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했다.

기적소리마저 독립 염원의 소리로 들려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을 내렸다.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학생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고 유관순 역시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3월 13일에 귀향하였다. 고향에 내려온 유관순은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삼천리 강산이 들끓고 있는데 우리 동네만 잠잠할 수 있느냐”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드디어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 정오에 만세운동을 하기로 정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자존과 기개를 잃지 않은 당당한 조선인

드디어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서 유관순은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를 유도했다. 정오가 되자 군중 앞에서, “여러분 ..... (중략) 우리는 1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라고 열변을 토했다. 유관순의 연설로 아우내 장터는 독립만세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시작했다. 이때 참여한 인원이 3천여 명이었다. 곧이어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고 지원 요청을 받은 천안 일본군 헌병분 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도착해 총검으로 학살하니 이 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돌아가셨고 집은 불타 버렸다. 유관순 열사는 그래도 시위운동을 계속했고, 결국 체포되어 천안 헌병대로 압송됐다. 유관순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을 쳤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면서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도 잃지 않았다.
유관순은 공주감옥을 거쳐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면서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독립만세를 불러 다른 수감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또한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 수감 중인 동지들과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결국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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