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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놀라워라 600년 비경.. 창덕궁 후원

2013-04-19

놀라워라 600년 비경.. 창덕궁 후원
창덕궁은 조선 왕조의 공식 궁궐인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궁궐, 창덕궁은 이궁으로 지어졌다. 이궁이란 나라에 전쟁이나 큰 재난이 일어나 공식 궁궐을 사용하지 못할 때를 대비하여 지은 궁궐을 말한다.

불행한 역사 속에서 탄생한 창덕궁
조선시대 왕자의 난 이후 결국 이방원은 3대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고 수도를 개경에서, 아버지가 수도로 삼았던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형제의 난이 일어났던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것은 싫었고, 그래서 경복궁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세우도록 했고, 그렇게 지어진 것이 창덕궁이다. 달리 말하자면 창덕궁은 왕위를 둘러싸고 왕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비극에서 탄생하게 된 것! 새로운 궁궐 터로 정해진 곳은 경복궁 동쪽 향교동(지금의 종로구 와룡동), 1404년 10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불과 1년 뒤인 1405년 10월에 새 궁궐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나라든 궁궐은 왕조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질서 정연하고 웅장하게 짓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궁궐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도 유교 예법에 따라 일직선 상에 질서 정연하고 웅장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에 반해 창덕궁은 주어진 환경에 맞게 지어져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즉, 창덕궁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을 이용한 공간 배치, 창덕궁은 궁궐을 구성하는 건물과 정원은 물론이고 작은 돌과 나무 한 그루까지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북한산과 매봉산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창덕궁과 연결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을 보면 창덕궁이 일부러 터를 만들어 건설한 궁궐이 아니라 자연 지형의 연장선상에서 지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연과 인공미가 조화를 이룬 후원
창덕궁 중에서도 북쪽 구역에 있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은 자연 지형과 경관을 잘 활용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장소이다. 나지막한 언덕과 계곡, 울창한 숲 주변에 세워진 건축물들은 어느 곳이 자연 공간이고 인공 공간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 각기 규모가 다른 곳의 골짜기를 중심으로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부용지, 애련지, 존덕정, 옥류천을 보면 조선 왕조의 정원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후원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왕과 왕족이 독서를 즐기고 휴식을 취했던 공간이자, 왕의 사냥터와 무술을 연마하는 곳으로도 쓰였다. 때로는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기도 했고, 연회장과 과거 시험장으로사용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후원이라는 명칭 이외에 궁궐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원’, 임금님만 출입하고 일반인은 금한다하여 ‘금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흔히 비원으로 더 잘 알려진 창덕궁 후원은 1976년 이후로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2004년 다시 개장해 그 빗장을푸니 실로 30년 가까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순결의 땅이다. 재공개된 지역은 후원의 주합루부터 옥류천에 이르는 1㎞ 남짓의 구간. 오솔길을 따라 20여개의 정자가 자리잡았고 가장 은밀한 곳에 마르지 않는 물 옥류천이 흐르고 있는데 후원에서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것이 반도지다. 이 반도지에 두 발을 담그고 서있는 정자가 있으니 관람정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부채골 정자로 현판 또한 얼마나 멋들어진지 모른다. 너무나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관람정에 오르면 반도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좌(左) 승재정, 우(右) 존덕정이 호위하듯 서있다. 승재정은 언덕 위에 높직한 데서 관람정을 굽어 보고 있고 존덕정은 보기드문 이중 처마의 정자다. 존덕이란‘덕성을 높인다’는 뜻으로 1644년 정조에 의해 세워졌다. 세도 정치의 틈바구니에서 탕평책을 펼치며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정조의 의지가 담긴 정자인 셈이다. 존덕정 너머 좌측으로는 폄우사가 있다. 폄우’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침을 놓는다.’는 뜻으로 폄우사에 오르는길에는 군데군데 돌이 박혀있다. 이것은 박석이다. 왕세자가 걸음걸이를 연습하기 위한 것으로 팔자모양이다. 한번 따라서 걸어보았으나 너무 힘이 든다. 양반 걸음을 21세기의 아녀자가 어찌 따라할 수 있을까.

맑은 물이 흐르는 옥류천 폭포수
후원 깊숙이 어슬렁 거리며 걸어가면 돌돌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인조가 만든 옥류천. 인조 14년(1636년)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맑은 물이 바위 둘레의 홈을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든 옥류천 주위는 창덕궁 후원의 가장 깊은 곳으로 어정과 정자, 수림이 조화를 이뤄 ‘우주’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바위에 새겨진 옥류천 세 글자는 인조의 어필이며 숙종은 소요암에 옥류천의 폭포수를 두고 ‘폭포는 삼백척인데/ 멀리 구천에서 내리네/ 보고있으면 흰 무지개 일고/ 골짜기마다 우뢰소리 가득하네’라며 칭송했다. 사실 이 폭포수는 한자(30cm)나 될까? 글을 읽을 때에 아주 거대한 폭포수를 상상하다가 이곳의 ‘낙수물’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난다. 일개국의 ‘국왕’의 과장법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옥류천을 흐르는 물은 청의정과 태극정 사이를 타고 내려와 소요암의 홈을 따라 감돌다가 소요정 앞에서 가느다란 폭포수를 만들기도 하고 경주의 포석정처럼 유상곡수연을 만들기도 한다. 옥류천을 꼬불꼬불 따라가면 취한정,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농산정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쯤 보았다면 옥류천 상류의 어정으로 가보자. 어정은 임금님이 마시던 물이다. 인조가 옥류천을 만들면서 샘을 판 것으로 후원내에 있는 샘물 중 가장 물맛이 좋다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시원하고 맛이 좋다. 이쯤되면 나도 왕이 되지 않았나 싶다. 돌아 나오는 길에 보니 창덕궁 후원은 자연 생태계의 보고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더할 터이지만 160여종 29만 그루의 수목과 오색 딱따구리. 소쩍새. 원앙 등 천연기념물을 비롯해 40여종의 조류가 살고 있다. 현재 창덕궁에서 개방된 곳은 전체 면적의 5분의1 정도. 옥류천까지 개방해도 전체의 절반에 못 미치니 그 규모는 실로 방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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