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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서울 종로구 행촌동 딜쿠샤의 비밀을 찾아..

2013-05-17

서울 종로구 행촌동 딜쿠샤의 비밀을 찾아..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주택가 골목 끝에 제법 크고 이국적인 건축물이 하나 있다. 죽어서도 한국에 묻히고 싶어 했던 미국인 4대의 이야기가 담긴 곳이다. 이름은 딜쿠샤. 무슨 뜻이며 이들에게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딜쿠샤의 숨겨진 이야기

2006년 2월. 솜사탕처럼 포근히 함박눈이 내리는 날, 백발의 미국인 한 사람이 한국 땅을 찾았다. 이름은 브루스 테일러. 66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아내와 딸을 대동한 브루스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회상에 잠겼다. 그리고는 지그시 눈을 감고 딸 제니퍼에게 지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나의 할아버지 때부터다. 금광 기사였던 할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는 1896년 한국으로 오셨지. 아버지 앨버트 테일러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금광 엔지니어가 되셨다. 동시에 UPI 통신사 특파원이기도 했지. 아버지는 한국에서의 긴박한 상황을 외국에 알렸는데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3·1 독립선언문을 갓 태어난 나의 침대 밑에 숨겼다. 나는 3·1 운동의 하루 전인 1919년 2월28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탄생했고 태어난 지 이틀 만에 한국의 독립과 관계된 거대한 일에 동참한 셈이지. 아버지는 이를 뉴스로 타전해 대한민국의 3·1 운동 소식을 전 세계에 알렸다. 참으로 뿌듯해 하셨어.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시기와 맞물리는 미국인 가족의 이야기

내 나이 4살이 되던 해(1923년) 아버지는 종로구 행촌동에 손수 집을 한 채 지으셨다. 결혼을 즈음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도에 계셨는데 그 때 인도 북부 곰띠(Gomti)강 근처에 있는 Dilkusha Palace라는 고성을 알게 되셨다. 딜쿠샤(Dilkusha)는 힌두어로 ‘희망의 궁전, 이상향, 행복한 마음’이란 뜻이다. 어머니는 나중에 집을 지으면 딜쿠샤(Dilkusha)란 이름을 붙이겠노라 다짐을 하셨고, 드디어 집이 완성되던 날. 두 분은 건물의 동쪽 측면 머릿돌에 "Dilkusha 1923"을 새겨 넣었지. 하지만 이름처럼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독립선언서를 타전한 아버지는 일본 정부에겐 미움의 대상이 되었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미일관계가 악화되자 아버지를 포함해 서울에 있던 외국인들이 감금되었다. 결국 1942년 5월,우리 가족은 추방당해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이다. “

브루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던 아버지 앨버트는 25년 후인 1948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내가 사랑하는 땅 한국, 아버지의 묘소 옆에 나를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다행히도 같은 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아버지의 유언은 지켜져 할아버지가 잠든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히셨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내가 살던 집이 무척이나 보고 싶구나. ”

브루스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동안 메리 테일러(부르스의 어머니)는 그간의 서울 생활을 기록한 자서전 <체인 오브 앰버>를 펴냈다. 그리고 손녀 제니퍼(브루스의 딸)는 할머니의 책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제작을 진행하고 있다. 브루스가 한국을 찾은 것은 딸 제니퍼의 다큐멘터리 촬영을 겸한 나들이였다. 서울은 몰라보게 변해있었지만 브루스는 아직도 또렷이 남아있는 딜쿠샤(Dilkusha) 초석의 글씨를 보았다. 놀라고 또 감사했다. 전쟁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는 데만 66년이란 세월이 걸린 테일러 씨에게 집이 허물어지지 않고 그대로 서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딜쿠샤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한국 근현대사에서도 더없이 값진 일이었다. 이 건물은 위치상 외관상 대한매일신보사의 사옥으로 추정돼 사적 지정과 신문박물관 설립 등이 추진되던 중이었는데 Dilkusha 1923이라는 글자의 진위를 밝히지 못해 논란이 되던 중이었다. 때마침 방문한 브루스 테일러로 인해 모든 것이 밝혀졌으니 이 또한 참으로 극적인 이야기다.

서울시 명예시민 브루스 테일러

딜쿠샤의 주인인 앨버트 테일러는 3.1 운동을 해외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3.1운동 가담자 수십명을 교회에 몰아넣고 죽인 ‘수원 제암리학살사건’을 국제사회에 보도해 더 이상의 집단학살을 막는데 일조한 장본인으로 서울시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이제 브루스 테일러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랑하는 딸 제니퍼와 함께 서울 시민이 되었다. 시민증 수여식에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서울 사진 17점을 시에 기증했다. 1920년대 시청과 원구단, 동대문, 고종황제 장례식 행렬 등을 담은 사진으로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는 “장례식 장면 등을 근거리에서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아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또, 브루스는 어머니에 이어 라는 책을 펴내기도 하는 등 ‘고향’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여전히 뜨겁다. 4대를 이은 한국과의 인연은 책으로 영화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2006년, 딜쿠샤가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서울시의 약속은 아직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아직 해결해야 될 과제들

그랬던 그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지 6년이 흘렀다. 그런 역사적인 의미와 상관없이 현재 딜쿠샤는 열댓 가구에 이르는 무단 점유자들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소유권은 기획재정부에 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새 주인’이 하나둘 늘어났다. 딜쿠샤를 위탁관리하고 있는 한국자산관리공사에서는 “국유재산법상 공시지가의 2퍼센트에 해당하는 금액을 변상금 명목으로 부과하고는 있지만, 강제집행은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비록 불법이기는 하지만 거주자들의 처지가 넉넉한 형편이 아니기에 무턱대고 쫓아낼 수도 없고, 이주 대책을 마련해주자니 법적 근거가 없고 형평성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저 방관하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안전 진단 결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즉 더 이상 사람의 거주가 불가능할 정도로 쇠락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육안으로 대충봐도 여기저기 떨어져나간 벽돌이며 부서진 콘크리트 사이로 보이는 철근이 위태롭게 느껴진다. 일본 군인들이 왔을 때 브루스 테일러씨의 어머니가 몸을 숨겼다는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 및 공간이나 2층 서재의 벽난로, 현관이나 마룻바닥, 계단, 창틀은 함부로 없애거나 덧댄 나머지 누더기처럼 변해버렸다. 한마디로 딜쿠샤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다.


찾아가는 길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3번 출구에서 나와 직진한다. 독립문 사거리를 지나 왼쪽 사직터널 방향으로 걸어간다. 길 건너 왼쪽으로 대신고교가 보인다. 사직터널 옆으로 오르막 골목길을 따라 올라 교남 노인정을 보면서 좌회전한다. 왼쪽에 주차장이 있다. 이 길의 이름은 은행나무 길로 앞쪽으로 좌측에 딜쿠샤가, 우측으로 은행나무가 보인다. 주소는 종로구 행촌동 1-8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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