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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바람도 쉬어가는 징비록의 산실, 안동 옥연정사

2013-02-01

바람도 쉬어가는 징비록의 산실, 안동 옥연정사
낙동강 줄기가 태극 모양을 그리며 돌아 부용대 절벽 아래서 북으로 용트림을 한다. 그래서 물돌이동 하회마을은 천하의 명당이다. 예로부터 명당에선 사람이 난다고 했으니 풍산류씨 집성촌인 하회마을은 수많은 인재를 품어냈다. 서애 류성룡은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벼슬을 물리고 조용히 지내며 징비록을 짓던 그곳에서 하룻밤 깊은 사색에 잠겨보자.


하늘이 낸 인물 서애 류성룡


하회마을은 천하의 명당으로 걷는 걸음걸음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곳 하회마을에서는 600년 전부터 풍산 류씨가 살았고 지금도 150여 가구 중 75% 정도가 풍산 류씨로 조선시대에만 대과 급제 21명, 무과 급제 5명, 생원·진사 합격 73명을 기록했으니 하회마을은 수많은 인재를 키워냈다. 하회마을이 키워낸 인물 중 서애 류성룡(1542∼1607년)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도산서원에서 수학할 때 퇴계 이황은 류성룡을 일컬어 ‘하늘이 낸 인물’이라 칭찬했다. 일본의 침략을 눈치 채고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해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행주대첩과 한산도대첩을 일궈내는 등 임진왜란으로부터 조선을 지켜냈다. 퇴계 이황 선생이 류성룡를 가르칠 때 ‘저 아이는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칭찬했다한다. 과연 나라가 위험해 처했던 임진왜란 때 류성룡 선생의 활약은 대단해 마치 임진왜란을 치르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한다. 통신사를 보내 일본의 움직임을 살피고, 명나라에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미리 알렸고, 군대가 오자 직접 맞이하며 싸움을 이끌었다. 또한 전쟁 중에 임금의 과한 도피를 막았고, 백성들의 힘을 북돋워 의병이 일어나게끔 했으며 권율과 이순신을 추천하고 도왔다. 대사헌 영의정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후 돌아와 조용히 지내며 후세를 위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국보 제132호)을 집필했으니 이곳이 바로 옥연정사다. 옥연정사는 화천이 하회마을을 시계 방향으로 휘감아 돌다가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옥소의 남쪽에 있다. 소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서 옥연정사라고 부른다.

푸른 하늘과 푸른 물로 마음을 씻는 곳

옥연정사로 가기 위해서는 하회마을 선착장에서 배를 타야한다. 서애(서쪽 절벽이라는 뜻)라는 류성룡 선생의 호처럼 그의 종택이 있는 하회마을의 서쪽 벼랑에 자리하고 있다. 눈부신 백사장에 내려 고개를 들면 옥연정사의 흙담과 기와가 보인다. 간죽문을 들어서면 가운데에 마루 감록헌을 두고 좌우로 방 1칸씩 세심재가 있는 사랑채 건물이 보인다. ‘옥연서당’, ‘광풍재월’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감록헌은 왕희지의 ‘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론 푸른 물 구비 바라보네’라는 시어에서 따온 것이고 세심재는 ‘마음을 닦고 씻는 곳’이라는 뜻이니 푸른 하늘과 푸른 물로 마음을 씻었음이다. 서당채에서 뒤로 살짝 물러난 곳에 원락재가 있다. 논어의 구절 중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에서 따온 것으로 친구의 내방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2칸 마루 애오헌과 더불어 원락재는 류성룡 선생이 주로 기거하신 방이고 징비록 집필은 감록헌에서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옥연정사는 병자년(선조 9년)에 짓기를 시작했지만 청빈한 류성룡은 집 지을 돈이 부족했다. 이 때 탄홍 스님이 자원해 곡식과 베를 조달하니 10년이 지난 병술년(선조 19년)에 완공되었다. 옥연정사 앞마당에는 수령 450년 된 종송이란 소나무가 있다. 류성룡이 어린 소나무를 심으며 이 나무가 커서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자란 모습을 볼 수 없음을 안타까와하며 시를 남겼는데 류성룡은 이 나무를 심고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새털같은 비비추가 핀 흙담 너머로 새하얀 모래사장과 푸른 하늘 아래 하회마을을 감싸는 화천이 흐른다.

서애 류성룡처럼 옥연정사 즐기기

현재 옥연정사는 김정희 김상철 부부가 위탁관리하고 있다. 충효당(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 종손 어른의 허락으로 421년 만에 옥연정사의 문을 열어 역사의 현장에 머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들 부부는 옥연정사에 대한 궁금증 해결사이기도 하지만 옥연정사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지극하다. 이는 방명록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서책처럼 만든 방명록에는 이제껏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글과 그림과 시가 담겨있는데 영어, 일본어, 태국어, 아랍어 등 국적도 다양한 사람들이 어느새 옥연정사 매니아가 되어 있었다. 옥연정사에서는 어떻게 지내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옥연서당기를 권한다. 옥연서당기는 옥연정사를 마련한 다음 류성룡이 생각을 적은 글로 원지정사가 있었지만 마을이 멀지 않아 그윽한 맛을 누리기에 아쉬움이 있었다한다. 일부러 배를 이쪽 편에 매어두면 사람들이 모래사장에 와서 소리를 지르다 지쳐서 돌아가곤 했는데 류성룡은 세상과 한 발작 떨어진 옥연정사에서 서적과 친구하며 그 의미를 찾기도 하고, 산과 계곡을 거닐기도 하고, 바위에 앉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흰 구름과 물고기와 새들과 어울려 지내며 마음이 즐거웠다 한다. 이것이 바로 류성룡처럼 옥연정사를 즐기는 방법일 것이다. 이른 아침 간죽문을 나서면 소나무 한그루가 서있는 작은 공터가 있다. 그곳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낮은 바위가 있으니 땅에 박혀 있으니 걸터앉아 새벽풍경을 감상해보자. 400년 전 류성룡이 그 바위에 그렇게 앉아 하회마을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풍경 속에서 조용히 삶의 근본을 일깨워보는 곳이 옥연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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