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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해볼까? 율곡 이이의 자운서원'

2013-01-04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해볼까? 율곡 이이의 자운서원'
자유로를 달린다. 파주로 들어서니 임진강 줄기가 친구하자 따라온다. 잠시 눈요기를 즐기다 내륙으로 들어서 자운서원에 도착한다.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율곡을 만나러 오죽헌으로? N0!

자운서원에 들어서니 강인당 양쪽으로 360년을 지내온 느티나무 두 그루가 오랜 역사를 대변하듯 위엄 있게 서있다. 강인당 뒤쪽에는 율곡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문성사가 있는데,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 선생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율곡이이는 조선 중기의 대표학자로 어머니는 익히 알고 있는 신사임당이며 중종 31년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옛날 사람들이 호를 지을 때는 특별한 의미를 두기도 하지만 거주하는 동네이름으로 짓기도 했다. 율곡 이이는 선대로부터 살았던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했는데 밤나무골인 율곡에 살았기 때문에 호를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진짜 율곡’을 만나다

율곡선생 유적지 안쪽에는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 노씨 묘를 비롯해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등 가족묘 14기가 있다. 율곡 선생의 묘로 올라가는 길은 하늘을 바라보며 올라가게 된다. 제법 가파른데다 양옆으로 있는 송림이 있고 가운데 능선을 따라 묘가 있기 때문이다. 4단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맨 위에 율곡 선생 묘가 있고, 그 아래로 맏형 부부의 묘, 신사임당과 이원수의 합장묘인 부모님 묘, 그리고 가장 아래쪽에 맏아들의 묘가 있다. 율곡 이이의 묘가 어머니인 신사임당과 아버지 이원수의 묘 보다 높은 묘역 맨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니 자식의 묘가 부모의 묘 위에 위치한 역장의 모습이다.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자식이 현달하거나 입신양명한 경우에는 이처럼 묘를 쓰던 당시의 풍습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는 안내판과 해설사의 설명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처럼 일가족의 묘가 같은 지역에 있는 것은 고려 말부터 행해져 조선시대에 일반화되었다고 하며, 부모의 묘 아래에 자식의 묘가 위치해야한다는 생각은 조선중기와 후기이후부터라고 한다. 아들딸 구별 없이 부모를 모시던 조선전기의 풍습에 따라 신사임당이 외가인 강릉에 20여년을 머물며 율곡을 낳은 것과 비슷하다. 누군가는 손자를 감싸 안은 부모님과 형님을 율곡 선생이 감싸고 있는 듯하다고 표현했다. 율곡 선생 묘소 앞에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있고, 부인 곡산 노씨의 묘는 이이의 묘보다 조금 위쪽에 전후합장묘의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스스로를 세우는 글 ‘자경문’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율곡 이이는 덕수 이씨 이원수 공과 어머니 신사임당의 4남3녀 중 셋째 아들이다. 명종 13년 13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는데 이후 모두 9차례나 과거에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리기도 했다. 29세에 호조좌랑으로 임명된 후 황해감사, 대사헌 등을 거쳐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임진왜란을 예견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의 실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노력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뤘으며 학문을 이론만이 아닌 구체적인 시책으로 여겨 민생과 국가 재정 문제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선생의 저서로는『성리설』,『성학집요』,『격몽요결』등이 있다. 율곡은 16세에 정신적 지주이자 학문적인 스승이며 자애로운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잃는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슬픔으로 3년 상을 마치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금강산에서 1년을 지낸 후 오죽헌으로 돌아온 율곡은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다시 공부에 열중하면서 자신의 앞날을 설계하게 된다. 이때 율곡이 만든 것이 ‘자경문’인데 스스로를 위한 인생의 지침서 같은 것이다. 모두 11가지 조항으로 되어 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하나, 뜻을 크게 가지자. 둘, 말을 적게 하자. 셋, 마음을 안정시키자. 넷, 혼자 있을 때를 삼가고 게으름을 이기자. 다섯, 책을 읽자. 여섯, 욕심을 버리자. 일곱, 일을 할 때는 성심을 다하자. 여덟, 정의로운 마음을 갖자. 아홉, 반성하는 마음을 갖자. 열, 밤이 아니면 눕지 말자. 열하나,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하자’는 내용이다.

자색 노을 가득한 임진강변

가을볕이 완연한 잔디밭을 거닐다 율곡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서 임진강가의 화석정을 찾았다.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은 임진강을 내려다보는 경치 좋은 곳의 정자로 율곡이 시간 날 때마다 들러 학문을 닦고 시를 짓고 명상을 하며 제자들과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던 율곡 선생이 돌아가시던 날, 온 백성이 울었는데 장례를 치르는 날하늘 가득 자줏빛 구름이 뒤덮였다고 한다. 자줏빛 자(紫)에 구름 운(雲)을 써서 자운서원이됐다. 황포돛배가 서 있는 임진강변에 저녁놀이 들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강과 하늘이 율곡 선생의 장례일처럼 자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집으로 돌아가면 온 가족이 모여앉아 각자의 자경문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해본다. 또한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받아들여졌다면 팔년 뒤의 임진왜란은 어떻게 되었을지, <만언봉사> <시무6조> 같은 상소가 모두 받아들여졌다면 어찌 되었을지, 49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 율곡이 퇴계 이황처럼 70세까지 살았다면 또한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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