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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길에서 만나는 역사, 군산에는 아직도 탁류가 흐른다……

2012-12-21

길에서 만나는 역사, 군산에는 아직도 탁류가 흐른다……
1899년 5월1일, 군산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었다. 조그만 포구였던 군산항이 부산, 원산, 제물포, 경흥, 목포, 진남포에 이어 일곱 번째로 개항을 한 건 순전히 ‘쌀’ 때문이었다.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거점 구실을 했으니 목포와 비슷한 내력이다. 조그만 포구로 개항 당시 500명이 채 안 되었던 군산 인구는 8,000여명의 일본인들이 건너오고 조선인들이 더해지며 북적되는 도시가 되었다. 해망로 주변으로 조선은행과미곡취인소(미두장)를 세우고, 대규모 항만시설과 도로를 건설했다. 군산내항의 뜬다리(부전교)와 나가사키18은행, 군산세관 건물이 그 흔적을 말해준다. 어쨌거나 당시의 군산은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되고 성장한, 일본인들의 도시였던 셈이다.

인간 채만식을 만날 수 있는 채만식 문학관

1937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가 후에 단행본으로 출판된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의 공간배경은 군산이다. 군산에 살고 있는 ‘초봉’이라는 여인의 비극적 삶을 통해 일제 식민시대의 어둡고 혼탁한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풍자했다. 초봉의 슬픈 삶을 통해 뒤틀린 조선의 사회상을 풍자한 「탁류」에는 1930년대의 군산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맑던 물도 군산에 이르면 탁류로 변한다는 암시적인 표현을 통해 일제 수탈의 역사가 서린 군산의 모습이 보인다. 탁류의 도시 군산에서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곳은 채만식 문학관이다. 금강 변에 자리한 문학관은 정박한 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채만식의 삶과 작품을 접할 수 있는데 특히 1층 전시실의 원형공간은 채만식의 삶을 시대에 맞춰 소개하고 있다. 채만식은 동아일보·조선일보와 <개벽사> 기자를 지냈고, 1925년 단편 ‘새길로’로 조선문단에 추천되며 등단했다. 초반에는 희곡 ‘사라지는 그림자’ 등 동반작가적 작품을 발표했으나 1930년대 들어 풍자성 짙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 중 풍자적 기법이 가장 훌륭한 작품이 「탁류」로 평가되고 있다.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소설 속 장소들

문학관을 나오면 금강이 눈에 들어온다. 소설 속 탁한 금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금강하구둑을 잠시 감상하고 시내 쪽으로 향하다보면 소설「탁류」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이 하나씩 나타난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째보선창은 금강하구로 흐르던 강줄기가 동부 어판으로 살짝 째지면서 선창을 이룬 곳이다. 원래의 명칭은 죽성포구인데 마치 째보(언청이)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설 「탁류」에서 정주사는 서천 땅을 처분한 후 똑딱선을 타고 째보선창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미두장에서 돈을 날린 후 째보선창에서 “나 혼자 죽으면 그만이지! 두루마기 둘러쓰고 풍덩 물로 들어 자살이라도 해볼까”며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내항 바로 앞에는 옛 조선은행 건물이 있다. 정주사의 사위가 되는 고태수가 다녔을 은행이다. 1923년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 군산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한다. 은행원인 고태수는 은행돈을 횡령해 주색잡기에 빠지고 돈으로 사다시피 해 정주사의 딸 초봉과 결혼을 하는데 미두에 손을 대다 망하고 만다. 조선은행은 쌀 반출과 토지강매 등 수탈이 공공연히 진행된 일제 식민정책의 본산이었다.

미두장에서 펼쳐지던 1930년대의 현실

이번에는 미두장이다. “미두장은 군산의 심장이요, 전주통(全州通)이니 본정통(本町通)이니 하는 폭 넓은 길들은 대동맥이다. 이 대동맥 군데군데는 심장 가까이 여러 은행들이 서로 호응하듯 옹위하고 있고, 심장 바로 전후좌우에는 중매점(仲買店)들이 전화줄로 거미줄을 쳐놓고 앉아 있다.” 채만식의 글에서처럼 일제 강점기 군산은 쌀이 모여드는 곳이라 미두장이라고 하는, 현재의 주식과 비슷한 형태의 노름이 성행하였다. 군산의 미곡취인소(속칭 미두장)는 1932년 l월 1일 문을 열었고 당시 건물은 본정통 23번지에 있었는데 현재의 100년 광장 앞 도로이다. 정주사는 미두장에서 돈을 모두 잃고 밑천 없이 덤벼드는 하마꾼이 되어 버린다.“정 주사는 시방 미두장 앞 큰길 한복판에서, 다 같은 ‘하바꾼’이로되 나이 배젊은 애숭이한테, 멱살을 당시랗게 따잡혀 가지고는 죽을 봉욕을 당하는 참이다. 시간은 오후 두 시 반 …… 중략 …… 싸움은 퍽 단출하다. 안면 있는 사람들이 없는 배는 아니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지도 않는다." 붉은 벽돌로 단장한 인근의 옛 군산세관은 1908년 완공된 건물로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 등 건축재를 수입해 유럽 양식으로 지었다. 내부에는 군산항 개항 이후의 모습과 군산세관의 옛 모습들이 전시돼 있다. 인근의 부잔교(뜬다리) 또한 수탈의 상징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큰 배들이 부두에 정박할 수 없자 수위에 따라 높이를 자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부잔교를 설치했으니 1934년에 200만석의 쌀이 이곳을 통해 실려 나갔다한다. 금광동에 있는 동국사(東國寺) 역시 당시 군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일제와 함께 그들의 종교도 들어왔는데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로 문화재청이 지정한 ‘등록문화재 제64호’이다.

곳곳에 남아있는 일본식 적산가옥

이렇듯 군산에는 소설 「탁류」 속 배경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내항 쪽 뿐 아니라 군산시내에도 「탁류」의 한 장면이 재현되듯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는 장소들이 많다. 당시 시가지는 대부분 일본인 거류 지역이었는데 현재 구도심 지역 건물 가운데 약 20%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가옥이다. 특히 신흥동·장미동·영화동 일대에는 이른바 적산(敵産)가옥이 170여 채나 남아 있다. 적산(敵産)의 본래 뜻은 ‘자기 나라의 영토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의 재산, 또는 적국인의 재산’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선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을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한글 문패나 간판만 없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일제 강점기의 거리에 들어선 듯 착각할 정도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영화 ‘장군의 아들’과 ‘타짜’의 촬영지로 유명한 히로쓰 가옥이다. 큰돈을 벌어 군산부 의원을 지낸 일본인 히로쓰는 필요한 목재를 전부 백두산에서 가져와 지었다고 하니 당시의 재력과 호화로움을 짐작할 만하다.

모든 것을 품고 말없이 흘러가는 탁류

해망동 월명공원에 오르면 군산 시가지와 도도히 흐르는 탁류, 금강을 굽어볼 수 있다. 온갖 사연들을 쓸어 담은 탁한 물줄기가 서해로 밀려들어간다. 강 건너 멀찌감치 소설의 주인공 ‘정주사’의 고향 충남 서천이 보인다. 죽자고 해도 죽을 수 없고 살자고 해도 살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의 현실을 「탁류」는 다각적으로 그렸으며 생생하면서도 무덤덤하게 표현했다. 일제가 쌀을 반출하면서 경제적 침탈의 전진기지로 선택한 군산이 영화를 누리던 1930년대, 양심을 내팽개쳐버린, 내일이 없는 탁류 속 등장인물들이 곳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분노하고 좌절하고 있었으니 소설 속 흔적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일까? 지금 이곳이 소설 속 군산인지 군산 속 소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저 멀리 선유도로 들어가는 물길과 배가 보인다. 혼탁한 탁류를 빠져나가 신선들이 사는 섬에서 유유자적 하고 싶은 것일까? 그 배에 몸을 싣고 군산항을 빠져나가 본다. 노을지는 바다를 달리니 귓가로 스치는 바닷바람이 제법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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