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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왕의 아버지, 무소불위의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풍수지리

2012-12-07

왕의 아버지, 무소불위의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풍수지리
호젓이 즐기는 호반 드라이브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인 예산에 도착해 가야산으로 가는 길엔 창밖으로 예당저수지가 보인다. 우리나라에 있는 단일저수지 중 가장 커 여의도의 3.7배나 된다면 상상이 될까? 자동차로 저수지를 한 바퀴 도는데 2시간 남짓 걸리고 날씨가 궂어 물결이 높아지면 배를 타고 저수지로 나가는 것이 위험해 바다로 착각될 정도다. 무한천, 신양천 등이 흘러들어 먹이가 풍부하니 물고기 또한 많아 전국 최고의 낚시 명소로 소문난 지 오래, 따끈한 햇살을 등에 받으며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이 즐비하다.

영조임금의 5대손, 흥선대원군

슬슬 흥선대원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남연군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혈통으로 보면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8세손으로 왕권과 가까운 왕족은 아니었지만 그의 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영조 임금의 5대손이 되어 버렸다. 안동 김 씨가 정권을 잡고 있던 때라 왕족이 조금이라도 똑똑한 기미가 보이면 가차 없이 역모로 몰아 귀양을 보내거나 죽이던 시대였다. 따라서 가계상 왕권과 가까운 자리에 있던 이하응은 천하의 건달 혹은 모자라는 사람으로 행세해 안동김씨의 번득이는 눈을 피해 목숨을 부지해야했다. 2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살에 아버지마저 여읜 이하응의 초년과 중년 시절이 그리 행복한 편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이 아들이나 친형제 없이 죽었을 때 왕실의 친척 중에서 왕위를 잇게 했는데, 이때 새로운 임금의 아버지를 대원군이라고 불렀다. 이하응의 둘째아들 이재황이 왕이 되었으니 이하응은 왕의 아버지, 즉 대원군이 되는 것이다. 조선역사상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3명이 있지만, 왕이 즉위할 때 살아 있었던 사람은 흥선대원군이 유일하다. 해서 흥선대원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니 땅에 떨어진 왕권을 강화하고 외세를 배척하고 민생을 안정시킴으로서 호응을 얻었으나 서원철패와 호포제로 인해 양반들에게 반발을 샀고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또한 쇄국정책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황제 둘에 욕심을 낸 흥선대원군

자, 이제 믿거나 말거나 풍수지리와 흥선대원군의 이야기를 해보자. 안동 김 씨의 눈길을 피해 전국을 떠돌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풍수가인 ‘정만인’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정만인은 이하응에게 조상을 모시면 후대가 잘될 명당을 일러준다. 추천한 명당은 두 곳이었다. 2대에 걸쳐 황제를 낼 곳(가야산 동쪽)과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곳(광천 오서산)이었는데, 대원군은 '이대천자지지' 즉, 2명의 황제가 날 터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곳 명당자리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가야사에 불이 나고 절을 지키던 승려는 연못에 빠져 죽은 채로 발견 되었다. 항간에는 가야사를 호시탐탐 노리던 흥선대원군이 가야사 주지스님을 매수해 불을 지르도록 했다한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최고의 명당이라는 가야사 5층 석탑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을 모셨고, 이장을 하고 난 그 다음 해에 재황을 낳았다. 이 아이가 후일, 고종으로 즉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고종 황제가 되었고 고종의 아들 역시 왕위에 올라 순종황제가 되었으니 2대에 걸쳐 황제가 난다는 명당이 맞긴 맞는 듯하다.

남연군을 이장하던 남은들상여

가야산 중턱으로 남연군의 묘를 보러갔다. 오르는 숲길이 고즈넉하고 이름 모를 산새소리가 청아하다. 가는 길에 ‘남은들상여’가 보인다. 남은들상여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을 경기도 연천에서 이곳으로 이장했을 때 사용한 상여다.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넓은 천을 펼쳤다. 몸체에는 봉황, 용무늬 등이 새기고 색색의 띠와 술을 늘어뜨려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다. 상여는 사용 후 남은들에 주고 간 것이라 남은들상여라 부르는데 ‘남은들’은 광천리의 옛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상여는 사용 후 해체하는 데 남은들상여는 조립된 그대로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고, 음산한 일반 상여막의 분위기와 달리 밝고 환한 자리에 세워져 있어 아이들과 돌아보기에 좋다.

천하의 명당에 자리한 남연군묘

자박자박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남연군묘가 나온다. 이곳이 황제 두 명을 낸다는 천하의 명당으로 석문봉을 중심으로 좌우에 포진한 가사봉과 옥양봉이 좌청룡 우백호가 돼 남연군묘를 반원으로 감싸 안은 형국이다. 이 묘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곁들여 있다. 묏자리를 잡아주던 풍수가 정만인은 묘를 쓸 당시 도굴이 염려되니 석회석으로 다져 놓으라 했다. 1868년 4월21일 밤 오페르트 도굴 단이 묘에 이르렀으나 단단하게 굳은 석회석 때문에 묘의 일부분만 파헤치다 도주해 버렸고 이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쐐기를 박는 결과를 가져왔다. 풍수가는 명당뿐 아니라 먼 미래도 내다볼 줄 아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였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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