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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신당동 떡볶이 골목

2013-05-24

신당동 떡볶이 골목
서울 중구 신당 1동에 위치한 이 골목은 길 양쪽으로 떡볶이 전문점이 길게 늘어서 있어 떡볶이 골목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꽤 오랜 역사를 가진 이곳의 주 고객은 10대나 20대의 젊은이들이었으나, 이제는 그 유명세를 타고 다양한 층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실제로 가장 원조이고 유명한 마복림 할머니 떡볶이 가게가 가장 맨 앞에 있고 그 외에 떡볶이의 매콤 달콤한 맛이 전통적으로 예전부터 쭉 이어져서 인기를 끌고 있는 떡볶이 가게들이 쭉 널려 있다. 이 곳 신당동 떡볶이 골목은 저희 부모님들 세대때에도 인기가 많았고 특히 양많고 맛나고 값싼 떡볶이가 용돈이 부족한 학생들에게는 큰 인기를 누렸다. 이곳의 주 메뉴는 즉석 떡볶이로 프라이팬 위에 쫄면, 계란, 만두, 오뎅과 떡볶이를 함께 넣어 식탁 위에서 끓여 먹도록 푸짐하게 얹어준다.

국민간식, 떡볶이 사랑

사람들은 왜 떡볶이를 좋아할까? 떡볶이의 미학은 무엇보다 맵고 개운한 맛에 있다. 대부분의 간식거리가 달거나 느끼한 반면 떡볶이는 매콤한 자극으로 미각을 만족시킨다. 떡, 어묵 등 기본재료 외에 라면·쫄면·달걀·만두·튀김 등을 추가함으로써 어우러지는 맛의 변주 폭도 넓다. 만들기 쉬운 데다 '오징어' '카레' '치즈'떡볶이 등 창의력을 무한히 발휘할 수 있는 음식이라는 점도 한 몫 한다. 그리고 가격이 싸다. 5,000원이면 두 사람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고 한끼 식사로도 충분해 더 인기가 있다.

임금이 먹던 귀한 먹거리

지금은 길거리 음식으로 대중화가 된 떡볶이.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정월 음식 중 하나로서 임금이 먹던 귀한 먹거리였다는 사실을 아는지.. 누구나 즐겨 먹는 간식거리인 맵고 달콤한 떡볶이는 예전에는 임금님이 즐겨 먹던 귀한 음식이었다. 궁중의 정월요리였던 떡볶이는 고기와 야채를 듬뿍 넣고 고추 장 대신 간장으로 양념을 했다. 일반 서민들은 구경도 못할정도의 귀한음식이었던 셈. 사실 잡채도 궁중요리다. 조선시대에 이충이라는 사람이 갖은 야채를 볶아서 무쳤더니 맛이 너무 좋아서 왕에게 선물한 것이 잡채의 유래인데 이충은 그 덕에 호조판서 까지 오르게 됐다한다. 하지만 현대의 잡채는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떡볶이는 어묵 라면 쫄면 달걀 등 각종 사리에 맵고 짠 고추장 듬뿍 넣어 신세대의 입맛을 사로잡는 현대 떡볶이와는 맛과 재료에서 큰 차이가 있다.

떡볶이 집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때는 떡볶이 집이 그리 많지 않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 본격적인 떡볶이 골목이 되어 갔다. 그 당시 떡볶이는 배고픔을 달래는 서민들의 음식으로 1970년 대인지라 떡볶이도 연탄불에 만들어 주었다. 우후죽순 떡볶이 집이 생겨 나다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신당동 떡볶이 골목을 소개한 후 입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게 되었다. 학생들이 몰려 들던 70년대 중반 지금은 없어진 '바보들' 이란 떡볶이 집에서 뮤직박스를 설치, 아마추어DJ가 신청곡을 받아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이 뮤직박스와 DJ는 대단한 인기여서 주위에 모여 있는 떡볶이 집들도 너도나도 뮤직박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떡볶이를 먹으며 듣고 싶은 음악을 듣는다" 참으로 낭만적인 발상이며 여유있는 삶이 아닌가 싶다.

세월은 흘러 연탄불은 LPG를 거쳐 요즘의 부르스터로 바뀌었고, 떡볶이에는 오뎅을 비롯해 각종 사리들이 등장해 지금은 떡볶이하고 하기엔 쑥스러울 정도로 떡이 적고 다른 부재료가 많이 들어간다. 아무튼 신당동 떡볶이촌은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젊은이들의 대표적인 ‘간식 상권’이었다. 하지만 10~20대들이 햄버거나 피자 같은 서구 인스턴트 식품으로 몰리면서급속히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90년 후반 이후 젊은이들의 취향은 코엑스몰·강남역·동대문 처럼 먹을거리·즐길거리·볼거리·옷가게가 한데 합쳐진 ‘복합상권’으로 빠르게 옮겨갔기 때문이다. 한창 때 30개도 넘던 가게 수가 5~6년새 절반(14개)으로 줄었다. 하지만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다시 북적이니 그 골목을 걸어보자.

신당동 떡볶이골목 돌아온 ‘DJ’

“오랜만에 만난 그녀, 떡볶이를 너무 좋아해/찾아간 곳은 신당동 떡볶이집/떡볶이 한 접시에 라면 쫄면 사리 하나/(중략)/그녀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제쳐두고/쳐다본 것은 뮤직박스안의 DJ라네/무스에 앞가르마 도끼빗 뒤에 꽂은/신당동 허리케인 박….” 인기그룹 DJ DOC가 몇해전 유행시켰던 ‘허리케인 박’이라는 노래다. 정말 90년대 초까지 신당동 떡볶이집에는 음악을 틀어주는 디스크자키(DJ)가 있었다. 80년대 이곳의 최고 스타였다는 허리케인 박은 신당동 DJ의 대명사인 셈. 사라졌던 그 DJ가 다시 등장했다는 소식에 신당동으로 달려갔다. “오늘은 흘러간 노래를 들려 드릴게요. 떡볶이 드시면서 감상해 보세요.” 도착한 가게에서 떡볶이 한 접시를 시키고 앉자 당대 스타였던 장현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밤시간에 ‘아이 러브 신당동이라는 가게를 지키는 DJ. 5년 경력의 박씨는 깔끔한 진행으로 손님들에게 인기가 높다. 80년대 중반 인기 DJ였던 김씨도 짬짬이 ‘우정출연’하고 있다. 이내 손님들은 DJ부스로 신청곡을 적은 쪽지를 건넸다. 요즘 인기가요가 80% 정도를 차지하지만 옛날 LP판을 찾아야 하는 노래도 적지 않다. 음악다방과 롤러스케이트장에서 노래를 틀어주는 ‘DJ 오빠’가 최고 우상이던 시절이 있었다. 뒷주머니에 꽂아둔 도끼빗으로 멋을 부리던 그들이었다. 당시 신당동에서도 한 가게에 2~3명 이상의 DJ가 있었다. 하지만 90년대초 이들은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떡볶이의 인기가 떨어진데다 영상에 민감한 세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DJ들은 하나둘씩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끼어 들었다. ‘아이 러브 신당동’의 공동사장인 박재철(40)씨였다. 자신이 바로 그 유명한 ‘허리케인 박’이라고 소개했다.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그는 ”고등학교때 부모님이 하던 떡볶이 가게에서 DJ를 했고, 당시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고 늘어놓았다. 박씨가 내놓은 결론은 “어떻든 떡볶이는 영원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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