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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서울 성곽

2013-06-14

서울 성곽
서울성곽을 소개하려 한다. 천천히 걸어 오르면 생각이 정리되고 또 낙산공원쯤에 이르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니 한 걸은 떨어져서 서울을 마라보는 것, 그 곳에 내 자리와 위치를 다시한번 새겨보기에 좋은 곳이다. 먼저 서울 성곽이 무언지 잠깐 살펴보자. 1392년 7월, 고려를 무너뜨리고 개성 수창궁에서 조선을 건국안 태조 이성계는 한달이 채 못되어 천도를 결심하고 태조 3년 1394년 10월에 도읍지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긴다. 이후 태조 4년 9월에는 궁궐 종묘 사직 등을 완성하고 다음달에 도성축조도감을 설치, 태조 5년1월 9일부터 본격적인 서울 한양도성 축성 공사를 시작했다. 한양도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도읍의 성곽' 즉 도성으로서 기능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그 길이 역시 현존하는 도읍의 성곽 중 최장의 길이를 자랑한다. 지금도 원래 전체 둘레 18km 중 12km에 걸쳐 세워져 있는, 서울 도심의 대표적인 역사문화유적으로,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재목록에 등재됐다. 전쟁에 대비하고, 평시에는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거나 도적 방지를 위해 만들었다. 원래는 한양 성곽이라고 불렀는데 서울의 내사산인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연결하여 쌓았는데 궁궐, 종묘사직과 관아를 지키고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성벽으로 높이가 12m에 이르며 동서남북에 4대문 동대문(흥인지문), 남대문(숭례문), 서대문(돈의문-멸실), 북대문(숙정문, 1976년 문루복원)을 두었다. 그리고 그 중간 중간에 4소문(小門) 남소문(남동, 광희문 1975년복원), 동소문(동북, 홍화문, 혜화문, 멸실), 자하문(북서, 창의문), 서소문(서남, 돈의문 멸실)을 두어 팔괘 방위로 배치하였다.

유교문화의 근본인 인의예지신...

경복궁 동쪽엔 ‘목’의 성정인 ‘인(仁)’을 넣어 흥인지문을 세웠다. 서쪽 방위엔 ‘금’의 성정 ‘의(義)’를 넣은 돈의문을 건립했다. 숭례문은 정궁인 경복궁에서 보았을 때 남쪽에 해당한다. 남쪽방위를 상징하는 ‘화’의 성정인 ‘예(禮)’를 대문 이름에 넣어 숭례문(숭례문)이라고 했다. 북방엔 ‘수’의 성정 ‘지(智)’를 넣은 대문을 세워야 했지만,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북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침범하여 서울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진다 하여 문을 만들어 놓기만 했을 뿐, 활용하지 않았다. 대신 숙정문 서북쪽으로 약간 비켜 지금의 상명대학교 앞쪽에 ‘수’의 성정 ‘지(智)’자를 새긴 홍지문을 세워 북대문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끝으로 성곽 중앙엔 보신각을 세워 방위상 중앙을 뜻하는 ‘토’와 신(信)을 배치했다. 그리고 동대문-서대문, 남대문-북대문이 만나는 가운데에 믿을 신을 넣은 보신각을 세워 종을 달고 그 종을 쳐서 성곽문을 열고 닫고 하였다. 태조 4년(1395년) 도성 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서북면, 동북면 등지에서 동원된 118,700명의 장정을 투입하여 1396년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일부 쌓고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197,400명이 동원되어 완성하였다. 총 공사 기간은 98일이 걸린 셈이다. 당시 평지는 흙으로, 높은 곳은 돌로 쌓았는데, 길이는 총 18.9Km. 세종 때 남산에서 인왕산까지 32만2천4백 명을 동원하여 모두
돌로 쌓는 한편, 활과 총을 쏠 수 있는 시설을 곁들여 만들었다. 또 숙종 때는 인왕산 동북쪽에서 낙산까지 쌓았다. 그 후로 조선시대 후기인 숙종 30년(1704)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고, 다시 영조 19년(1743)에 부분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아래 서울의 성곽을 마구 파괴하였고 해방과 6, 25 혼란기에는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다행히도 1961년부터 복원을 추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종로구에서 성북구로 가는 터널은 성곽을 헐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성곽 밑으로 터널을 뚫으니 문화재 보존 측면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낙산코스 따라가기

낙산코스의 출발점은 동대문. 지하철 동대문역에서 나오면 이대부속병원옆으로 난 창신 성곽길’이 서울성곽으로 안내한다. 여기서 잠깐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놓기 전 반드시 보고 갈 것이 있다. 자신들이 도성을 축조하는데 일익을 담당했음을 보여주는, 이름이 새겨진 돌이 있기 때문이다. 나무에 가려져 있어 자칫 놓치기 십상이다. 새겨진 성곽의 돌에는 숙종때 삼군부 중에서도 훈련도감 군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른바 오늘날 표현으로 치면 공사 실명제인 셈이다. 이 같은 공사실명제 표시는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중간중간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동복시’가 눈길을 끈다. 동복면에 사는 사람들이 공사를 시작한 지점이라는 뜻이다. 동복시라면 오늘날의 전남 화순군 동복면을 일컫는다고 한다. 서울의 도성을 쌓는데 전국의 백성들이 참여했다는 증거다. 성곽의 고풍스러움과 동대문 일대의 풍경을 함께 감상하며 석축의 단을 세며 쉬엄쉬엄 오르길 20분, 정상이다. 이곳이 바로 서울의좌청룡에 해당되는 낙산이다. 너무 가까운 곳에, ‘서울에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감탄사를 절로 나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성곽을 잇는 남산, 인왕산, 북악산이 한눈에 보여 성곽의 줄기에 대한 개념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 또한 오른쪽으로는 도봉산에서 정면의 북악 인왕산, 왼쪽으로는 남산까지 도심의 산과 사대문 안 빌딩숲이 눈앞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외 코스들

▲ 성북동코스

성북동코스는 돼지갈비, 돈까스, 칼국수 등 맛집들이 즐비한 성북동 성북초등학교앞 삼거리의 서울과학고 뒤편에서 시작된다. 이곳 산책로도 잘 정돈됐지만 낙산코스 보다 경사가 급하고 계단이 많아 걸음을 자주 멈추게 한다. 성벽 너머의 저택들이 즐비한 성북동 풍경이 볼만하다.

▲ 인왕산코스

인왕산 코스는 산책이라기 보다는 산행이 적절하다. 출발지는 사직공원. 경사가 급한 인왕산길(인왕스카이웨이)을 한 10~15분쯤 허덕허덕 오르다 보면 무악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만난다. 무악동쪽 길을 따라 100m 가량 가면 성벽과 함께하는 인왕산등산로가 시작된다.

▲ 남산코스

남산의 서울성곽 답사는 동대문운동장 인근의 광희문에서 시작한다.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고 해서 시구문으로 불리는 곳이다. 서울성곽의 위용은 장충체육관 뒤편에서 이어진다. 체육관과 신라호텔 뒤로 성벽은 오밀조밀한 집들을 끼고 남산으로 힘차게 올라간다. 타워호텔 뒤편까지 이어진 성벽은 잠시 끊어졌다가 남산정상에서 순환로를 따라 내려 오는 산책길에 다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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