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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우정총국, 대한민국 최초 우표에 얽힌 미스터리

2013-07-05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옆에는 회화나무 한 그루와 한옥 한 채가 있다. 대한민국 근대우편업무가 시작된 곳이고 대한민국 최초의 우표가 태어난 곳이다. 하지만 그 우표는 한 달도 쓰이지 못했다. 왜일까?

우정총국의 업무 개시

내 이름은 문위우표(文位郵票), 생일은 1884년 11월18일이다. 세계우표가 탄생된 지 44년 만에 내가 태어났다. 나의 탄생에는 병조참판 홍영식(1855-884)의 공이 컸다. 조선시대 통신수단은 역참제로 이루어져 왔었다. 역참제는 100여리마다 숙박시설과 말을 준비해 릴레이식으로 소식을 전하던 제도다. 당시 홍영식 선생은 개화에 눈을 떠 신사유람단으로 일본과 미국을 방문하여 근대 문물제도를 눈여겨보던 터였다. 특히 서양의 우편제도가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해 고종황제께 우편제도의 필요성을 상소하였다. 이에 고종황제는 1884년 4월 22일, “각국과 더불어 통상한 이래 안팎의 관계와 교섭이 날로 늘어나고 따라서 관청, 상인들이 주고받는 통신이 많아지게 되었다. 진실로 그 통신을 적절하게 체전(遞傳)하지 않으면 소식과 기맥을 잇대어서 멀고 가까움이 일체로 될 수 없다. 이에 명하노니 우정총국을 설립하여 연해의 각 항구에서 왕래하는 서신을 관장하고, 내지(內地)의 우편도 또한 마땅히 점차 확장하여 공사의 이익을 거두도록 하라...”고 칙령을 내렸다.다음날 홍영식은 우정총국 총판에 임명되고 개국 준비가 시작되었다. 법규 제정, 업무 분장 등의 준비기간을 거쳐 반년 후인 1884년 11월 18일, 드디어 우정총국이 업무를 개시했다. 총판·방판 각 1명과 그 아래에 3과 15부를 둔 독립기구였다. 일본·영국·홍콩 등 외국과 우편물교환협정을 맺었고, 인천에 분국도 개설되었다. 그리고 나 문위우표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나 빛을 보게 되었다. 문위우표는 총 다섯 종류로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으로 구성되었다. 당시의 화폐단위가 '문(文)' 이었기에 내 이름이 문위우표다.

우리나라 우표의 탄생

일본대장성 인쇄국에 의뢰, 제작하여 우정총국 개시인 11월 18일에 우표가 발행되어 서울-인천간 우편업무가 시작되었다. 종로 네거리, 남대문 문안 등 10곳이 지정돼 우표를 팔았다. 하지만 우정총국 개시일까지 5문과 10문만 도착하고 나머지 25문, 50문, 100문은 도착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우편업무가 시작되고 보름 남짓, 12월 4일 밤 우정총국의 발족 축하 만찬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날 개화파와 수구파가 대적해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기선을 잡았던 개화파는 3일 만에 실패해 버렸다. 신식 우편제도도 사흘만인 12월6일 폐지되고 말았다. 근대우편업무를 시작한지 불과 19일, 우정국 낙성식 3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뒤늦게 도착한 25문, 50문, 100문의 우표는 사용되어 보지도 못했으니 최초 발행우표이자 미발행 우표가 되어 버렸다. 그 후 근대식 우정업무는 11년간이나 중단되었으니 문위우표도 당연히 쓰이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짧고도 한 많은 인생이다. 1895년 다시 우편업무가 시작되었고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장소, 우정총국은 현재 체신기념관이 되었다.

우초에 담긴 자주독립 의지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를 보면 전면에 ‘COREAN POST’라는 영문과 함께 ‘대조선국 우초’라는 글자가 나온다. 1884년 근대우편제도를 처음 도입하면서 지금의 우표를 우초라 이름지었기 때문이다. 우표의 옛 이름이 우초인 것이다. 그런데 이 ‘우초’에는 참으로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1984년 체신부가 발간한 한국우정 100년사를 보면 우초라는 용어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나와 있다. 우정총국은 개화파 홍영식이 미국과 일본에 출장을 가 우편제도를 보고 자극받아 고종에게 우편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해 생긴 것이다. 일본에서 들여오는 만큼 우편 용어도 일본 것을 그대로 가져올 법한 상황인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정 100년사에는 “당시 체신관계 용어 제정에 있어 우리 국권의 자주독립을 견지하여 적절한 용어를 창안했다”고 적혀 있다. 우표는 우초로, 우편은 우정으로, 서류는 등기로, 특사배달은 별분전으로, 우편함은 우정괘함으로, 배달부는 우체군으로 바꾸어 표현했고, 그밖에 집신, 분전, 우낭 등의 독창적 용어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우초 하나에도 자주정선을 담은 것이다. 하지만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이 폐지되었다가 10년 뒤인 1895년 우편사업이 재개될 때는 우초 대신 우표라는 말이 사용됐다. 그해 6월 중앙에 태극기, 4각에는 왕실의 문장인 이화가 그려진 4종의 우표가 발행되었는데, 이를 태극우표라 칭한 것이다. 독창적 용어라고 평가받던 우초는 그렇게 역사 속의 용어가 되어버렸다.

체신기념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우정총국

체신기념관 내부에는 1900년대 초의 우정총국의 자료를 만날 수 있다. 우표, 우편물 무게를 다는 저울, 사무용 종이 인쇄판, 날짜를 찍는 인장, 인장함 등이다. 우정총국 전시물 중에는 당시 집배원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초기 집배원은 흰 두루마기를 입고 도롱이를 쓰고 있다. 신식 우편제도의 집배원은 소매에 우자 디자인이 들어가 있는 양복제복을 입고 있다. 체신기념관으로 쓰이는 우정총국을 비롯하여 우표마당, 편지정원, 전신의 뜰, 커뮤니케이션 광장 등으로 꾸며진 우정공원 한편에는 그동안 쓰였던 우체통도 놓여있다. 커뮤니케이션 광장에는 우체국 우편 코드가 적힌 세계지도가 있어 각 나라를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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