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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돌담... 은행나무... 예기치 않은 이야기 , 강진 병영마을

2013-11-22

돌담... 은행나무... 예기치 않은 이야기 , 강진 병영마을
강진 병영마을에 있는 네덜란드식 돌담
강진 병영마을, 이름에서 군대 냄새가 난다. 맞다. 병영마을은 병영성이 있는 마을이고 병영성(사적 397호)은 둘레가 2천8백 척에 높이는 18척, 옹성이 12개인 제법 큰 성이다. 조선왕조 500년 간 군사 거점 역할을 하며 제주도를 포함해 53주 6진을 총괄했다. 당시에는 세(勢)가 커서 병영성 주위에 3000여 호가 살았다고 한다. 지금의 열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우굴 거렸다는 말이니 놀랍기만하다. 고즈넉한 마을길로 접어든다. 끝도 없이 돌담이 펼쳐진다. 그런데 돌담의 모양새가 참으로 특이하다. 납작한 돌을 골라 15도 정도 눕혀서 촘촘하게 쌓고 흙으로 고정시킨 후 다음 층은 반대방향으로 15도 정도 눕혀 쌓았다. 커다란 돌이 듬성듬성 박혀있는 우리네 흙돌담과 조금 다르다. 주의 깊게 돌담을 보고 있으니 이 마을 아저씨가 한마디 하면서 지나간다. 이것은 네덜란드식 돌담이란다.

한 많고 사연 많은 하멜과 그 일행
1653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58년 전, 암스테르담을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스페르웨르 호는 거센 폭풍을 만나 제주도 서쪽 모슬포 해안에 표류한다. 함포를 포함한 각종 병기와 향신료, 설탕, 명반, 동물가죽 등 30만 냥에 이르는 무역품이 실려 있었던 배는 산산조각이 났고 64명이던 선원은 36명만이 살아남았다. 생존자 중 한 사람이 바로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1630~1692)이다.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방에 소개한 인물로 네덜란드 사람으로 하멜은 동인도회사의 선원이었다. 1654년(효종 5) 5월까지 제주도 지방관의 보호를 받다가 제주에서 1차 탈출 실패 후 서울로 압송된다. 서울에서 2년을 보낸 하멜과 그 일행은 1656년(효종 7) 3월 초, 청나라 사신들과 접촉했단 이유로 당사자 2명은 죽임을 당하고, 한 사람은 병을 얻어 죽게 된다. 서울에서도 2차 탈출을 시도, 실패해 이곳 전라병영에 억류되었다. 죄인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파란 눈 서양인의 눈으로 본 강진
1656년, 하멜 일행이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는 어땠을까?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란, 그래서 짐승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가지 않은 생김에 아이들과 여자들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도망쳤고 남자들은 돌아서 다녔다한다. 죄인이었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기근과 흉년, 잡역에 시달렸다. 부역과 노동으로 돌담을 쌓았고 겨울에는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수인산에 올라 땔감을 마련했고 구걸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앉아있는 800살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 385호)는 하멜일행이 고단한 일을 하다 잠시 쉬던 장소다. 멀리 수인산성을 바라보며 고향생각에 잠기곤 했다. 이방인이라는 특이사항과 억류인으로 살며 고향을 그리는 외로움에 생활의 고단함까지 더했을 생각을 하니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졌다.

땀들이던 은행나무, 천렵하던 적벽청류
7년여의 세월이 흐르며 몇몇은 결혼을 했고 생계를 위해 잡역을 하거나 나막신을 만들어 팔고 춤판을 벌여 삯을 얹기도 했다. 또 모험담을 들려주는 대가로 돈을 받기도 했다. 서툰 조선어로 의사소통을 할 정도가 되었으니 모험담을 파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수입도 조선 땅에서 통했다는 말이다. 은행나무를 한 번 더 보고 돌담을 따라가니 제법 큰 개울이 나온다. 이곳에는 ‘적벽청류’라 새겨진 바위벽이 있는데 그 아래에서 하멜 일행은 천렵을 즐겼다. 절반의 한국인이 된 이들이 개울가에 솥을 걸고 한복바지를 둥둥 걷어 올리고 우리네 한국 사람처럼 천렵을 즐겼을 광경을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난다. 1663년(현종 4) 2월, 지난 3년 동안 기근이 심해 하멜과 그 일행을 수용할 수 없다는 지방관의 요청으로 하멜을 포함한 12명은 여수 지역으로, 5명은 순천 지역으로, 나머지 5명은 남원 지역으로 보내지게 된다. 하멜이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의 인원은 33명, 여수로 떠날 당시 22명이 생존 했으니 나머지 11명은 이곳 병영 땅에 뼈를 묻었음이다. 여수 지역으로 오게 된 하멜을 포함한 12명은 전라좌수영 문지기 생활을 시작했으며 시간이 흐른 뒤 한 어부를 설득, 배를 몰래 사들여 7명과 함께 일본 나카사키로 탈출했다. 일곱 명이 탈출에 성공해 고국으로 돌아가 하멜표류기를 발표하니 조선생활 13년 28일만의 일이다. 네덜란드에 돌아간 하멜은 조선에 오게 되어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글로 남겼다. 소위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道難破記)』가 그것으로 조선의 사정을 서양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일 뿐 아니라, 당시 조선 사회의 실정·풍속·생활 등을 아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된다. 출간된 하멜 표류기는 당시 유럽사회를 뒤흔들었으니 신비한 동양이야기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유럽 사람들도, 네덜란드 사람들도 우리들을 무척 궁금해 했었다는 얘기다.

입에 착착 붙는 남도 음식 한 상
하멜의 흔적을 돌아보는 강진병영마을은 한 없이 예쁘다. 하멜 일행의 땀방울이 맺힌 돌담 발치에는 빨간 가슴 들어내며 봉숭아가 한들거리고 무지개 모양의 동그란 다리에 용머리를 단 병영홍교와 매화마름 가득한 저수지를 구경하노라니 유난히 코가 큰 벅수가 눈에 띄며 그것에게도 하멜의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어느덧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어댄다. 한 상 가득 푸짐한 남도 음식을 앞에 놓고 먹을 것이 없어 고생했다는 하멜 생각을 하니 미안하기 그지없지만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은 어찌할 수가 없다. 상에 올라온 남도식 김치와, 젓갈, 무순, 청국장, 호박나물을 보며 이러한 음식을 처음 입에 넣었을 순간, 하멜의 표정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13년 만에 돌아간 네덜란드에서 구수한 남도 육자배기 한 자락과 오묘한 남도의 맛을 기억해 내고 또 그리워했을까도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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