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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유자와의 동화 같은 풍경, 설국 雪國, 대관령 양떼목장

2013-12-27

유자와의 동화 같은 풍경, 설국 雪國, 대관령 양떼목장
겨울이면 강원도 깊은 산골에 살았던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른다. 자고 나면 온통 하얀 나라가 되었던 뭉툭뭉툭한 기억, 산줄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이어지는 순백의 나라, 오늘 다시 그때의 설국을 헤맨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한 남자가 희고 포근한 세상을 만나고 있었다. 끝없이 희고 또 흰 그것은 끝날 줄을 모르는 눈의 나라, 설국(雪國) 그것이었다. 이 세상은 태초부터 그렇게 희었었고 또 그렇게 눈이 가득한 세상이었음을 본 그의 ‘설국’은 세상에 알려졌다. 1948년 집필한 ‘설국’으로 인도의 시성 타고르에 이어 동양인으로서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의 이름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 그가 헤매고 고뇌하던 ‘설국’의 배경은 니가타 현의유자와였다. 소설의 제목처럼 온통 눈이 덮인 유자와는 군마현과 경계가 되는 다이시미즈 터널을 통과하면 나타난다. 희고 큰 천사의 날개처럼 보드랍고 하얀 벌판이 펼쳐지는 그곳은 판타지 소설 혹은 영화 속으로 빨려드는 듯 눈(目)앞엔 눈(雪), 그것밖에 없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지는 그런 곳이다.

설원과 설원이 만나는 대관령 양떼목장
우리 땅에도 그런 곳이 있다. 하늘과 구릉이 맞닿은 곳. 그곳에 올라서면 이 세상이 원래부터하얀 세상이었을 것 같은 그런 곳, 대관령 양떼목장의 겨울 풍경이다.
해발850~900m의 대관령 구릉 위로 펼쳐진 목장은 6만2천 평의 드넓은 초원에 양들을 방목한다. 1988년 풍전목장으로 시작하여 2000년 겨울부터 대관령 양떼목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관광목장이 되었으니 1.2km의 산책로를 따라 목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 걸리는 시간은 40분 정도, 건초 주기 체험과 양털 깎기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실은 지난여름에도 이 길을 걸었었다. 끝없는 초원에 초록 덩어리의 나무가 이따금씩 서있고 양들은 떼를 지어 이리 저리 몰려다니며 풀을 뜯고 있었다. 복슬복슬하고 통통한 양은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보던 바로 그 양으로 털을 깎아 사용하는 면양, 메리노계통의 코리데일종이다. 푸른 초원 위의 양떼와 동화 속 같은 풍경은 자유와 여유, 한가함 평화로움……. 그런 단어들을 줄줄이 떠오르게 했다.

황금빛 눈가루가 날리는 설국의 풍광
그러다 시간의 바람이 스쳐 가면 목장 너머 숲이 노랗고 빨갛게 변하고 목책 너머의 초원도 누런 빛깔로 변해간다. 그리고는 이내 겨울이 와 버렸다. 그사이 양들은 축사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따금씩 눈 구경을 나온다. 이제는 축사 안에서 양들에게 사료주기 체험을 해야 한다. 건초를 한줌 쥐면 푸른 초원의 냄새가 배어있는 건초를 향해 양들이 다가온다. 서로들 머리를 들이밀며 하나라도 더 먹으려 몸싸움을 하는 양들, 털은 자랄 대로 자라 복슬복슬하고 걸음은 뒤뚱뒤뚱. 여름 풀밭에서 만났을 때보다 둔한 몸집이지만 귀여움은 여전하다. 어떤 가족이 양털 깎기 체험을 하다가 시간이 없어 반만 깎고 가버려 양의 몸이 반은 털북숭이에 반은 헐벗었던(?) 해프닝이 떠올랐다. 그것이 벌써 지난여름이니 시간이란 놈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이제 눈 세상이 된 양떼목장은 이 세상의 구성 성분이 오로지 ‘눈’하나 뿐이라고 주장한다. 바람 한 줄기 스쳐 가면 사르르 떨린다. 양떼목장을 뒤덮고 있는 눈은 밀가루 반죽처럼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밀가루 보다 작은 눈가루였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처럼 바람에 흩뿌려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보다 더 설국 같은 풍경이다. 파란 하늘 아래 은백(銀白)의 세상이던 곳에 석양의 햇살이 더해지면 사금가루가 흩날리듯 금가루 같은 눈가루가 반짝이며 날린다. 저도 모르게 움찔하게 되고 순간 전율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간다.

시간의 바람이 스쳐가는 대관령
이제 또 시간의 바람이 스쳐 가면 샛노란 민들레가 파란 풀들 사이로 얼굴을 비집고 올라와 자신을 봐 달라 바람에 흔들릴 것이며, 5월 하순이 되면 양떼목장 주변으로 붉디붉은 철쭉이 흐드러지게 필 것이다. 그들의 질기고도 숭고한 생명력과 양떼목장을 품고 있는 것은 대관령이다. 백두대간에 있는 고개, 하늘에서 떨어진 물 한 방울이 대관령 마루금에서 약간만 동쪽으로 치우치면 오십천이 되어 강릉을 지나 동해로 빠질 것이고 조금만 서쪽으로 떨어지면 굽이굽이 남한강을 따라 서해로 흘러갈 것이다. 고개가 험해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에서 음을 빌렸다고 하는 대관령 자락, 그곳에는 11월 말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듬해 3월까지 밤 평균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고 눈과 바람과 온도의 삼박자가 맞아야하는 황태덕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장엄하고도 오묘한 자연에 인간은 서른세 번의 손길을 얹어 황태탄생을 돕는다. 인간도 그저 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렇게 자연에 녹아들어간 사람들의 흔적, 눈과 바람과 나무와 토끼처럼 자연의 일부인 사람이 대관령에 스미어 있었던 흔적을 대관령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설피를 신고 눈밭을 걸었으며 스키처럼 생긴 나무판을 타고 살아남기 위해 대관령 설원을 누볐다. 그렇게 오가던 길 하나를 더 꼽자면 월정사 길을 들 수 있다. 자연 앞에서 무한히 작은 존재를 확인받고 또 생의 의지를 다지며 무사안녕을 빌러가던 전나무 숲길. 흰 눈이 쌓여 어디가 물줄기인지 어디가 길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그 곳에 언제인지 모를 앞서간 사람의 희미한 발자국 하나가 나 있다. “은하수가 흐르는 가운데 게다를 신고 꽁꽁 언 눈[雪] 위를 달리는 고마코(駒子)의 모습도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본 광경도 이러한 것이었을까? 소설 속 주요인물은 세 사람. 도심이 아닌 설국이라면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더 이상할 것이다. 자연과 사람과 눈. 이것이 태초에 이 세상을 만들고 책임지고 서로를 보듬는 구성요소의 전부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곳, 그곳이 바로 ‘설국(雪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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