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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원형극장 협률사 터를 찾아서, 인천 신포동의 애관극장

2014-09-26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원형극장 협률사 터를 찾아서, 인천 신포동의 애관극장
우리나라 최초의 열차 국철1호선인 지하철에 올라타고 인천역을 향했다. 우리나라 인구 3명중 1명이 보고 있다는 이순신에 관한 영화 ‘명량’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 요즈음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원형극장인 협률사 터를 찾아가는 길은 설레임 반 기대 반이다. 협률사를 찾아 나선 길에 먼저 인천최초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던 건물을 둘러보았다. 인천역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로 보이는 건물로 예전에 영국의 영사관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그 곳을 오르는 길에는 머루포도가 환영이라도 해주는 듯, 열매를 영글고 있었다. 지금은 파라다이스 호텔로 바뀌어서 새롭게 인천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해주는 곳으로 관광객들에게 편안함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1963년에 설치된 인천 제1호기’라는 명패만이 인천 최초의 엘리베이터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협률사터 가는 길
그곳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한참을 걸어가니 인천중부경찰서 앞이었다. 그 마당에는 1882년 7월 22일 성바오로회 수녀들이 최초로 조선 땅에 들어온 곳 임을 나타내주는 비석이 있었다. 때마침 프란치스코 교황이 내한하여 시복식이 열리는 날(2014. 8. 16)이라 더욱 뜻깊은 비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중부경찰서 맞은편엔 한중문화원이 버티고 서 있었다. 한중문화원과 인천 아트플렛폼 사이로 길게 나 있는 도로는 한때는 청나라와 일본의 경계가 뚜렸했던 청,일 조계지가 지금의 눈으로 봐도 한눈에 보였다. 1910년도에 인천의 근대개항지에는 인천시민이 약 1만 5천명 정도 거주를 하고 있을 때, 일본인은 무려 약 1만 2천명 정도 거주를 했다고 하니 그들의 세력을 짐작하고도 남겠다. 청, 일 문화가 잔재하는 그곳은 지금은 한중문화원과 인천 아트플렛폼으로 변신하여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굉장히 독특한 조형물 하나는 문승영 작가의 ‘인천-개항의 기억(시계탑)’이다. 시계는 개항을 의미하는 1883, 하와이 이민을 처음 떠났던 1902, 6.25전쟁이 있었던 1950, 인천공항개통을 알리는 2001을 의미하는 네게의 숫자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아직도 역사는 계속해서 흐르고 있음을, 지나간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함을 작가는 말해주는 듯 하다. 1966년부터 그곳에서 자리를 지켜왔다는 명월집에서 점심을 먹고, 드디어 최초의 극장이 있었다는 협률사 터를 찾아 나섰다. 신포시장을 지나 물어물어 찾아간 그곳은 지금은 애관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 했다.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나는 애관극장
웨딩, 가구의 거리에 위치한 애관극장엔 주말이어서인지 남녀노소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건물부터가 지금의 롯데시네마와 CGV 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극장 들어가는 입구부터 계단으로 되어 있어 주위를 살피지 않고는 입장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계단을 올라서면 BOX OFFICE 라는 커다란 글자 밑 창구에서 영화표를 팔고 있었고, 그 앞에는 표를 사겠다는 사람들로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일단 극장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기계대신 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애관극장, 요즘의 디지털 시네마와는 분명 차이가 느껴졌다. 극장 안에도 계단은 그대로 존재했다. 옛날식 그대로 유지하면서 전 국민의 1/3이 보고 있다는 ‘명량’을 상영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이, 기계대신 사람이 더 많은 그곳은 아날로그적 감성을 간직한 극장임에 분명하다. 극장 내부엔 애관극장에 대한 애정이, 안팎으로는 극장의 History가 안내되어 있었다. 배우 최불암씨도 이곳 애관극장에서 꿈을 키웠다고 한다.극장의 유리창 너머로 답동성당이 보였다. 지척에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과 극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근대개항도시인 만큼, 그 당시 각국의 외국인들이 많았던 만큼 서양식 원형극장인 협률사가 이곳에 자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협률사의 역사
협률사는 1895년 세워졌는데, 인천의 갑부인 정치국이 세웠다고 한다. 1926년에 애관으로 개명되어, 이때부터 연극과 영화의 상설관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이 최초로 경영한 활동사진상설관이었다. 애관극장은 영화뿐만 아니라 강연이나 연주회장으로도 명성이 있었는데, 세계적인 음악가 번스타인의 피아노연주회가 열리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애관극장 개관 1주년 기념으로 관객에 대한 사은품행사를 했는데, 1등은 백미1포, 2등은 광목 한필, 3등은 약주 1병이었다. 애관극장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60년 9월에 재건축되었다.

애관극장이 불러일으키는 향수
디지털 시네마에 익숙한 요즘에 애관극장은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전통과 현대가 살아 숨쉬는 110년의 역사를 지닌 애관극장.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위로를 받고, 그곳에서 기뻐하고, 그곳에서 울분을 토로하고, 서로 공감하며, 서로를 격려해주었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러한 애관극장은 인천의 시민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요, 등불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으로 애관극장이 지속되길 빌어본다. 과거를 품고 있으면서도 미래를 꿈꾸는 그곳, 애관극장에 가면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아주 가끔씩은 경인철도에 몸을 싣고, 종착역에 내려서 인천의 근대역사문화회랑의 길을 따라 애관극장에 들러 가슴에 남는 영화 한 편 감상하는 특별한 경험을 해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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