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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예수회 역사

2013-03-30

갑작스런 교황의 사임 뒤 드디어 새 교황 프란치스코가 탄생했습니다.
교황의 사임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최초로 남미에서 교황이 선출됐다는 사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예수회 소속이라는 것입니다.
예수회는 우리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은 수도회인데요, 오늘은 예수회가 어떤 단체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예수회는 1534년, 스페인의 전직 군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창립한 수도횝니다.
이냐시오는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있던 중 성령을 체험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1500년대 중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교황청을 공격하는 95개 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이 1517년입니다.
이후 종교개혁 열풍이 유럽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결국 기독교에서 프로테스탄트와 성공회가 분리되는 데까지 이른 시기가 바로 1500년대 중반입니다.

교황청에는 교회역사 최대의 위기가 닥쳤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가톨릭 내부로부터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이것을 종교개혁에 대한 반격이라는 뜻에서 반종교개혁이라고 부릅니다.
이냐시오를 비롯한 6명의 예수회 창립자들은 이러한 반종교개혁의 분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회의 모토로 내세운 청빈, 순결, 순종이라는 세 덕목은 이러한 가톨릭 개혁의 관점에서 제기된 것이었습니다.
즉 청빈은 그 동안 가톨릭 사제들이 세속과 결탁하여 부를 축적해온 것에 대한 반성이었고, 순결은 많은 사제들의 성적 타락에 대한 속죄의 뜻이었으며, 순종은 그럼에도 루터와 같이 교회를 박차고 나가서는 안 된다는 일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회 창립자들은 활동 목표를 두 방향으로 설정했습니다.
하나는 교육이고, 또 하나는 해외 선교였습니다.
교육에 중점을 둔 이유는 교회가 그 동안 신자들에 대해 권위만 내세우고 학습을 게을리 함으로써 루터의 반격에 맥없이 당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회는 유럽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성직자는 물론 신자들 및 그 자제들에게 논리학과 수학과 같은 보통교육을 제공했습니다.
때마침 대항해시대를 맞아 부를 축적한 도시의 부르주아들은 교육에 대한 열망이 강했기 때문에 예수회는 시대의 요구에 적절하게 대응한 셈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서강대학교도 바로 예수회 소속 신부들이 와서 세운 학교입니다.
해외 선교 역시 당시의 시대 상황에 적응하여 선택한 전략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특히 중북부 유럽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열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나갔습니다.
이냐시오는 생각했습니다.
대항해시대가 열렸으므로 이제 사고도 전 지구적으로 해야 한다.
유럽의 절반을 프로테스탄트에게 빼앗기더라도 나머지 전 세계를 가톨릭이 차지하면 대세는 가톨릭편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그들은 아시아로, 남미로 선교사들을 파견하기 시작했습니다.
1549년에 이미 예수회 창립자 중 한 사람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일본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중남미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영화 ‘미션’으로 만들어져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바 있습니다.
중국에 온 예수회 소속 사제들로는 아담 샬, 마테오 리치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양의 학문은 물론 자명종과 같은 신문물을 소개하여 아시아에 서학 열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와 있던 소현세자가 아담 샬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회는 위기에 처한 가톨릭이 만들어낸 하나의 대안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 선출된 프란체스코 교황이 예수회 소속인 것도 어쩌면 요즘 부패와 성 추문에 시달리는 교황청이 내놓은 하나의 대답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역사 토막상식, 아하 그렇구나!
프란체스코 교황 선출을 계기로 예수회 탄생 역사를 되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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