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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남대문 명칭의 역사

2013-05-11

지난 2008년 2월 10일, 뜻하지 않은 화재로 무너져 내린 숭례문이 무려 5년 3개월이란 긴 복원공사를 거쳐
마침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숭례문과 함께 억장이 무너졌던 우리 마음도 이젠 기를 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겐 숭례문이란 명칭보다 남대문이 더 익숙했습니다.
이젠 남대문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요, 그 이유가 남대문이 일제가 우리 문화재를 경멸하기 위해 붙인 일제잔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연 남대문이란 명칭은 일제잔재인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남대문이란 호칭은 일제잔재가 아닙니다.
잘 아시다시피 숭례문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으로 한양을 결정하고 도성을 쌓으면서
동서남북 네 곳에 문을 냈는데, 그 중 남문의 공식명칭입니다.
그런데 숭례문을 지을 당시부터 이미 남대문이라는 별칭을 널리 사용했습니다.
사실 정식 호칭인 숭례문보다 남대문이란 별칭이 더 많이 사용된 듯합니다.
왜냐 하면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숭례문이 203회 등장하는 반면에 남대문은 252회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세종대왕님도 남대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고종황제 때 경인선을 개통하면서 만든 시발역 즉, 오늘날의 서울역의 당시 명칭도 남대문정거장이었습니다.
남대문이 일제잔재라고 생각하게 된 건 일제강점기 때 그 일대가 크게 개발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서울의 중심거리는 종로였습니다.
종각에서 오늘날의 명동을 지나 남대문에 이르는 남대문로는 종로에 비하면 발전이 훨씬 뒤쳐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항 후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그들은 오늘날의 충무로와 회현동 일대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곳에 일본 동경의 중심가 혼마치를 본떠서 명동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총독부는 명동을 중심으로 도시계획을 세웁니다.
오늘날의 한국은행인 조선은행을 세우고, 중앙우체국도 이곳에 둡니다.
물론 신세계 백화점 전신인 미츠코시 백화점, 미도파 백화점의 전신인 조지야 백화점 등도 이곳에 자리합니다.
이렇게 되자 종로는 점차 서울의 중심가 지위를 잃고, 남대문로가 부상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남대문 바로 옆에 남대문 시장이 들어서서 종로 시장의 규모를 능가하게 됩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에 남대문 주변이 집중 개발되고 일본인들이 그 혜택을 누리게 되면서 마치 남대문이라는 호칭 자체가 일제가 강요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때 우리 언론에 일제가 우리 민족의 맥을 끊기 위해 전국의 명산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보도가 나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후 쇠말뚝 뽑기 운동이 벌어지고, 심지어 뽑은 쇠말뚝을 독립기념관에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그런 목적으로 쇠말뚝을 박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뽑은 쇠말뚝의 성분을 검사했지만 일제강점기 때 것으로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본인들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내건 모토가 ‘탈아입구’ 즉,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아시아의 뒤떨어진 문화를 버리고 유럽의 근대 과학문명을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것도 미개한 한국인들을 일깨워주겠다는 것이 명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믿던 미신과 풍수를 경멸하던 일본이었습니다.
그런 일본이 풍수에 입각해 쇠말뚝을 박는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일제잔재를 극복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중요한 민족사적 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의 지각 있는 시민들마저도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에서 부쩍 침략 만행을 부정하는 발언이 심해지는 요즘일수록 우리는 더욱 냉철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토막상식, 아하 그렇구나!
복원된 숭례문을 보며 일제잔재 청산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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