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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차돈 순교에 얽힌 역사

2013-05-18

어제 5월 17일은 ‘부처님 오신날’이어서 고국의 모든 사찰에서 성대한 행사가 벌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불교는 1천 5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과 애환을 함께해온 종교입니다.
이런 불교가 처음으로 우리 민족에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때는 언제일까요.

불교는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백제에 먼저 전해졌지만, 결과적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신라의 불교가 우리 불교의 시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한 것은 법흥왕 때였습니다.
514년에 즉위한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해 신라를 부족연맹국가에서 고대국가로 승격시킨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불교를 공인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당시 신라는 아직 부족연맹체의 관습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각 지방의 부족은 자기 지방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각자 믿는 신들이 있었습니다.
법흥왕은 이러한 전통 신앙을 없애고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여 모든 백성들을 부처님을 섬기는 하나의 마음으로 통일시키려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섬기게 되면 그것은 곧 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중국에서 전해진 이러한 성격의 불교를 호국불교라고 합니다.
이러한 법흥왕의 생각에 대해 지방에 근거를 둔 부족 세력들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걸림돌을 만난 법흥왕이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충신 이차돈이 나서서 계책을 제안했습니다.
왕의 허락을 받은 이차돈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경주 부근에 천경림이란 숲이 있었는데 그곳은 백성들이 오래 전부터 숭배해오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차돈은 이곳에 불교 사찰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바라본 귀족들은 ‘왜 함부로 신성한 곳에 절을 짓느냐’며 따졌습니다.
이차돈은 ‘이것은 왕의 명령’이라며 들은 척도 안하고 밀어붙였습니다.
귀족들은 법흥왕에게로 몰려가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법흥왕은 짐짓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이차돈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이차돈이 불려오자 왕은 ‘내가 너더러 절을 지으라고 했단 말이냐?’ 하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이차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바꾸어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법흥왕은 크게 화를 내며 그 자리에서 이차돈의 목을 베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차돈과 미리 짜놓은 각본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법흥왕은 귀족들에게 ‘앞으로 나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모두 이차돈과 같이 될 것이다.”라며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법흥왕은 이차돈이 천경림에 짓던 절을 계속 짓게 했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은 서슬이 시퍼런 법흥왕의 기세에 눌려 감히 뭐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법흥왕은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누르고 불교를 공인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목에서 젖과 같이 하얀 피가 높이 솟구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잘려진 그의 머리는 멀리 날아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아마도 법흥왕이 자신의 몸을 바쳐 불교 공인에 공을 세운 이차돈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신성하게 꾸며낸 얘기였을 겁니다.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불교는 늘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직접 나서서 구원하는 호국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역사 토막상식, 아하 그렇구나!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이차돈의 순교에 얽힌 역사를 되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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