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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개항 130주년을 맞는 인천의 역사

2013-01-26

어느덧 2013년도 1월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그 해의 숫자가 지니는 특별한 의미를 되새기게 되는데요, 올해는 서울에 인접한 항구도시 인천이 개항한 지 1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오늘은 개항 이후 인천이 변화하고 발전해온 역사를 되돌아보겠습니다.

인천은 1883년에 개항되었습니다.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에 따른 것인데요, 부산은 조약 즉시 개항했지만 인천은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개항은 곧 외세에 우리 자신을 노출시키는 불리한 일이라는 당시 지배층의 인식 때문에 서울에서 먼 곳부터 순차적으로 개항을 하게 된 결과입니다. 하지만 인천은 일단 개항을 하자 서울에서 가깝다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급속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이 됩니다. 1894년엔 전보가, 1898년엔 전화가 조선 최초로 개통됩니다.
그리고 1899년엔 최초의 철도 경인선이 부설됐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인천에서 서울까지 12시간 동안 걸어서, 혹은 8시간 동안 배를 타고 왕래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기차를 타면 불과 1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근대화 과정이 순탄치 않았듯이 인천도 외세의 시달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가 상륙한 곳이 인천이었고,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 등이 일본으로 탈출한 곳도 인천항을 통해서였습니다.
청일전쟁 때 청 일 양국 군함이 정박한 곳도 역시 인천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인천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급격하게 늘어났고, 각국의 조계지가 형성되고 외국인 거리도 생깁니다.
일본에 합병되기 직전인 1910년 당시 인천의 인구는 3만 1천 명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외국인이 무려 1만 6천 명이 넘었습니다.
당시의 통계 수치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외국인 주민의 비율이 50퍼센트를 넘었다는 것은 당시 인천의 위상을 대변해줍니다.

해방 이후 분단의 역사 속에서 인천은 또 다른 역할을 합니다.
바로 6‧25전쟁의 전환점을 이룬 인천상륙작전의 현장이 됩니다.
전세를 뒤바꾸는 중요한 역할이었지만, 정작 그 작전의 과정에서 인천은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즈음이 되자 인천은 북에서 월남한 피난민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1955년 당시 인천의 인구는 4만 2천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북한 월남민이 4만 명이었습니다.
경제개발시대에 인천은 수입과 수출의 관문 역할을 맡습니다.
수많은 공단이 생기고 대규모 항만이 건설됐습니다.

공장과 항만에서 일하기 위해 타지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인천은 130년 전에는 제물포라는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130년 동안 외국인, 월남인, 노동자 등 외지인들이 끊임없이 이주해온 이주민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인천이 외부 문화에 대해 개방적인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이 남과 북의 체제 모두에 환멸을 느끼고 제3국을 향해 떠나는 배경이 인천인 것도 이런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인천은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이라는, 세계화 시대에 동북아시아의 허브공항을 중심으로 여전히 한반도의 관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역사 토막상식, 아하 그렇구나!
인천개항 130주년을 맞아 130년동안 변모해 온 인천의 역사를 되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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