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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시대 무관, 강홍립

2013-08-24

우리 주위의 지명에는 역사 인물의 이름을 단 곳이 많습니다.
서울의 대표적 거리인 세종로는 세종대왕을, 을지로는 을지문덕 장군을, 퇴계로는 이황을 기리는 의미에서 지어진 도로명입니다. 그런데 어떤 지명은 누구의 이름을 빌은 것인지 잘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서울의 외곽 관악구에 있는 난곡입니다. 난곡은 조선 중기 광해군 때의 무관 강홍립을 기리는 지명입니다. 강홍립이 어떤 인물이었기에 지명에 등장할 수 있었을까요.

1618년 윤사월, 명 나라가 조선에 중대한 요청을 해왔습니다.
명이 요동 지방에서 급히 세력을 키우고 있던 여진족들을 치려고 하니 군사를 보내달라고 한 것입니다.
조선 국왕 광해군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사정은 외국에 군대를 파병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0년도 채 안 돼 전후복구에 바쁜 처지에 외국에 군대를 파병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명은 임진왜란 때 친히 군대를 보내 우리를 구해준 은인이었기에 단박에 거절할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친명파가 대부분인 대신들은 파병 준비를 재촉했지만 광해군은 신중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의 우유부단한 태도는 내외의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우선 국내의 관료들이 명의 요청에 부응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명으로부터의 파병 요청도 날이 갈수록 거세어져 갔습니다.
결국 광해군은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강홍립 장군을 파병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장군은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에 힘을 쓰라.”
비록 명의 강요에 의해 파병은 하지만 괜히 우리 군대가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때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적당히 싸우는 척 하다 세가 기울면 항복하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쨌든 강홍립 장군은 1619년 2월 1만 병사를 이끌고 요동 지방으로 출정하고 명군과 합세하여 부차라는 곳에서 여진군과 최초의 접전을 벌입니다.
이때 강홍립은 식량이나 무기 등 보급품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앞장서는 것을 피하고 후방으로 물러나 주둔했습니다.
그리고 전세가 여진족 쪽으로 기울자 여진족에게 “우리는 명나라의 강요에 의해 출병했으며 조선은 여진과 적이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을 통보하고 항복합니다.
한편, 강홍립의 항복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조정은 벌집 쑤신 듯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명에 대한 사대를 철칙으로 생각하던 대신들은 강홍립의 비겁한 처신에 대해 성토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끄덕도 하지 않고 강홍립을 감쌌습니다.
이러한 광해군의 정책 덕분에 여진이 날로 강성해져서 명을 멸망시키는 와중에도 조선은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623년 3월, 정계의 최대 당파였던 서인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내쫓고
새 국왕으로 인조를 세웁니다.
이른바 인조 반정이죠.
쿠데타와 함께 광해군의 정책은 모두 폐지됐고, 외교정책에서는 명을 멸망시킨 후금을 치자는 북벌론이 대세를 장악했습니다.
이로써 동북아 평화체제는 깨졌고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명분론자들이 원하던 대로 오랑캐와 일전을 불사하자는 호전적 목소리가 정가를 뒤덮었고
실제로 머지않아 청으로 국호를 개명한 여진족의 침입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순식간에 밀어닥친 청군에게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인조는 항복하고 말았죠.
이때 청군과 함께 내려온 조선인 출신 장군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강홍립이었습니다.
8년 만에 귀국한 그를 두고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친명파 대신들은 그가 후금에게 항복하고 후금의 앞잡이가 되었으므로 참수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옹호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여진족에게 점령당한 조선인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강홍립 자신도 여진족의 풍습을 따라 변발을 하지 않은 것을 들어 그가 조국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처벌은 면했지만 관직을 삭탈당한 강홍립은 같은 성씨인 진주 강씨가 모여 살던 고향, 오늘날의 난곡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냅니다.
이곳에서 그는 난을 기르는 것이 취미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난곡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강홍립이란 인물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서울의 변두리 가난한 동네 난곡, 그것이 자랑스러운 이름이 될 것인지, 부끄러운 이름이 될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역사 토막상식, 아하 그렇구나!
서울시 관악구 난곡이라는 지명과 관련해 조선 중기 강홍립 장군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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