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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영조의 리더십 - 경제 분야

2013-04-06

영조은 스스로 사치를 싫어하고 백성들에게도 검소함을 강조한다.
본래 서민적 체질인 영조는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금주령을 시행하는 등 실천을 위한 조치를 내린다. 경제 분야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개혁을 추구한 영조의 업적 중 경제 분야에 관한 일들을 건국대 사학과 신병주 교수와 함께 살펴본다.

서민적 체질
영조는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의 소생으로 청 장년기를 궁궐이 아닌 사가에서 보냈다.
서민들과 더불어 지낸 그 시절의 영향으로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었다고 볼 수 있다.
잘 먹고 잘 입는 것이 근력을 소모하는 원인이라고 할 만큼 사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도 늘 검소한 생활을 한다. 술도 마시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한 덕인지 영조는 83세까지 장수한다.

강력한 금주령 시행
영조는 술은 곡물을 낭비할 뿐 아니라 백해무익한 것으로 보고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개탄하였다.
전 백성을 대상으로 강력한 금주령을 실시한다. 몰래 술을 마시다 걸리면 엄벌에 처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영조 38년 1762년에 남병사 윤구연이 술을 빚어 몰래 마시다 걸렸다.
영조는 당장 윤구연을 잡아오라 하여 참수하여 목은 숭례문에 걸어놓았다. 당시 이를 너무한 일이라고 비판한 신하들까지 파직하는 등 금주에 관한 한 영조의 신념은 확고했다.

균역법 제정 등 경제적 업적
탕평책이 영조의 정치적 업적이라면 ‘균역법’은 영조의 경제적 업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는 백성들이 세금으로 납부하던 군포를 1년에 2필에서 1필로 반으로 줄이는 것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하는 세제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그 당시 군대를 가지 않는 대부분의 백성들은 군역이란 이름으로 매년 2필씩의 포를 내야했는데 그 부담은 상당히 막중한 것이었다. 이 군역 제도에서 양반들은 제외됐으므로 일반 백성들의 부담만 가중되고 불만이 높았다. 군포 납부가 반으로 줄어 재정이 준 것은 부자들에 대해 토지세 등을 부과해 보충하였다. 일반 백성들의 세금은 감면하고 부자나 양반들에게 세금을 새로 걷어 재정을 충당한 영조의 정책을 새길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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