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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조 -규장각-

2013-05-04

정조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유능한 학자들을 모으고 연구 활동을 적극 지원해 조선 후기 문화, 학술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규장각을 중심으로 한 정조의 업적에 관해 건국대 사학과 신병주 교수와 함께 조명한다.

법고창신(法古創新)
‘법고창신’ -옛것을 배워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정조의 개혁 정치의 상징적인 정신이다. 규장각을 새로 정비하고 그 곳에서 옛 왕들의 업적을 연구해 더욱 나은 정책을 개발, 정치에 반영한다는 것이 정조의 신념이었다.
정조의 신념에 의해 유명무실하던 규장각의 기능이 화대된다. 규장각이란 명칭은 세조 때도 있었다. 양서지의 제창으로 설치됐지만 뚜렷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숙종 때는 종친들의 모임을 위한 장소로 할용하며 규장각의 현판도 달았으나 학문 연구 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없었다.
이런 규장각이 정조 때 와서 대 변신을 한다.

창덕궁 후원에 2층 건물
규장각은 창덕궁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후원 영화당 연못 옆 낮은 언덕 위에 2층 건물로 지어졌다.
본 건물은 그리 크지 않으나 주변에 부속 건물들까지 합치면 꽤 큰 규모이다. 돈화문 근처에 임헌원이라는 사무실이 있고 국내외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들이 있다. 또 바람과 햇볓에 책들을 말리는 곳도 있다.
규장각 본원 외에 ‘외규장각’이란 곳이 있었는데 분원에 해당한다. 보다 안전한 곳에 귀중한 책들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채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소중한 책들을 약탈해갔다.
2011년 프랑스 정부는 한국에 약탈해갔던 서적들을 반환해 왔다. 현재 그 서적들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능력 위주 인재 발탁
정조는 규장각을 정비하고 신분과 계파를 초월해 능력 위주로 인재들을 발탁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다산 정약용, 그리고 서얼 출신인 박제가, 유득공, 서유고 등을 검서관 , 즉 책을 검열하고 연구의 중심이 되는 역할을 할 인재로 발탁했다.
정조는 이들이 연구에 전념하도록 최선의 지원을 했다. 창덕궁 후원을 학자들과 걸으며 시문을 주고받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여기기도 했다.
객내불기(客內不起), 즉 손님이 와도 일어서지 말라는 규칙도 세워 학자들이 연구에 전념하도록 하고 관리들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해 정치인들의 간섭도 배제했다.

학문적 성향 정조, 문화 발전에 기여
정조는 규장각 학자들을 위한 재교육 시스템도 만들었다.
또 1781년부터 정조가 서거하는 1800년까지 10여 차례의 시험을 통해 138명의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발탁했다.
이 인재들은 3년 간 의무적으로 정조의 개혁 정책 등에 대해 혹독한 교육을 받은 후 규장각의 학자로 활동하도록 했다.
스스로도 많은 책들을 펴낼만큼 학자적인 성향이 강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좋은 학자들을 기르고 그들이 좋은 정책들을 개발하도록 해 문화, 학술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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