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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 벽란도 중심 활발한 무역

2013-06-08

고려의 수도 개경과 가까운 황해도 예성강의 벽란도는 고려의 국제 무역항이다.
이 무역항을 중심으로 고려의 활발한 대외 무역이 이뤄졌다. 벽란도로 상징되는 고려의 대외 개방 정책에 대해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함께 알아본다.

중국 등과 활발한 교역
문장가 이규보의 ‘벽란도’란 시를 통해 벽란도의 풍경을 그려볼 수 있다.
예성강에서 반나절이면 남만, 즉 중국 남부에 닿을 수 있다는 내용 등 대외 무역이 활발한 모습이 그려진다.
중국 이외에도 고려는 서구와도 활발한 무역을 했다. Korea라는 국호도 이 당시에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프랑스 등 서구의 지도에 코리아란 명칭이 기록된 것이 1370년 대이다. 11세기와 12세기에 고려의 문화, 경제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다.

팔관회도 고려 개방과 연관
팔관회는 원래 통일신라 때는 불교행사로 전쟁 중에 사망한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행사다. 이 행사 동안 온 백성들은 맵고 자극적인 음식 등을 삼가는 등 8가지 계율을 지켜야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서 이 팔관회의 의미는 다소 변화된다.
임금과 신하, 백성들이 함께 즐기는 축제의 의미가 강했다. 첫 날에는 국왕이 지방 수령들로부터 축하 의식을 받는다. 둘째 날에는 송, 여진, 거란, 탐라국 등 외국 상인들이 왕에게 특산물을 바치며 인사를 하는 절차가 있다.
이후 팔관회를 계기로 벽란도 주위에서는 외국 상인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매매하는 커다란 장이 열린다. 벽란도와 팔관회는 고려 개방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외국 문물 적극적 수용
고려의 개방성은 대외 무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해외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했다.
특히 중국의 당나라를 모델로 많은 문물을 받아들였다. 중국의 문물을 주로 화풍이라 하고 고려의 문화를 국풍 혹은 토풍이라 했는데 詩書禮樂 등 중국의 좋은 문물은 받아들이되 사치 풍조는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학자들의 지적도 있었다.
또 쌍기와 같은 외국의 인재들을 적극 수용해 재상에 등용하기도 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고려는 역대 왕조 중 외국에 대해 가장 개방성이 강한 왕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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