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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 왕조의 전기와 후기

2013-06-29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무신정변을 기점으로 고려 왕조를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
그러나 고려의 역사적 사건들을 분석해보면 이런 구분이 맞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건국대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고려 왕조의 시기 구분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조선 초기 사학자가 쓴 고려사
고려의 역사를 서술한 대표적인 서적으로 정인지가 쓴 ‘고려사’를 들 수 있다.
이 고려사는 1451년에 편찬된 것으로 조선이 건국된 후 얼마 지나 나온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정인지는 고려사에서 조선 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무신정변이 일어난 1170년 이전에 고려는 흥성했지만 1170년 이후 즉 후기에는 고려의 정치와 사회가 혼란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런 시대적 상황 때문에 고려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세워진 나라가 조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의 역사학자가 쓴 ‘고려사’ 라는 점에서 역사 왜곡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사학자들은 주로 정인지의 ‘고려사’를 바탕으로 고려의 역사를 연구하기 때문에 무신정변을 중심으로 고려를 전 후기로 나누는 점에 동조하고 있다.

임금 측근들의 갈등으로 야기된 무신정변
1170년에 일어난 무신정변은 흔히 문신들을 숭상하고 무신들을 억압하는 것에 반발해 무신들이 일으킨 정변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왕 측근들의 내부 갈등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당시 의종의 호위 무신이던 정종부가 주동이었다. 정변을 일으킨 후 정종부는 임금 측근의 환관들을 처형한다. 이어서 임금 측근의 반 무신 성향의 문신들을 처단한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임금 측근 간의 내부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무신들의 반란으로 보기는 어렵다.

왕실 내부의 갈등 무신정변 이전부터 이어져
무신정변 이전에도 비슷한 사건들이 있었다.
1126년의 이자겸의 난과 1135년의 묘청의 난이 그것이다. 이자겸의 난은 왕실과 외척들의 갈등으로 야기됐고 묘청의 난 또한 개경에서 서경으로 천도를 둘러싼 갈등이 표출된 것이다. 이런 왕실 내부의 갈등이 이어져 무신정변이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획일적인 전-후기 구분은 무리
고려 왕조는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사회가 특징이다.
이런 고려 왕조의 다양성으로 한 사건 만으로 전.후기라는 선을 긋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고려 왕조의 다양성을 좀 더 심층적으로 바라보면 쉽게 시기를 구분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무신정변을 전후로 고려를 전, 후기로 나눈 것은 인위적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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