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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의 혼란기

2013-07-06

건국 초기에 다양성, 다원화를 추구하며 대외 개방정책으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사회 개혁을 추구하며 발전을 거듭하던 고려는 12세기 들어서면서 왕실 내의 갈등으로 혼란기를 맞게 된다.
고려 중기의 혼란 상황에 대해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얘기를 나눈다.

숙종의 왕위 찬탈
고려 왕조의 혼란은 숙종의 왕위 찬탈 사건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어린 헌종이 즉위하자 삼촌인 숙종은 헌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다. 조선 시대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것과 흡사하다. 12세기 초부터 고려왕조는 왕실과 외척 세력 간에 다툼이 있었다.
고려 왕실과 혼인 관계로 인주 이씨에서 7명의 왕비가 나왔다. 외척 세력이 막강해지면서
왕실 세력들과 권력 다툼이 심화됐다. 숙종의 왕위 찬탈에 이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그리고 무신정변에 이르기까지 그 근본 배경은 왕실과 외척 세력 간의 다툼이라고 볼 수 있다.

숙종과 예종 왕권 강화 정책 추진
인위적으로 권좌에 오르면 불안하다. 숙종과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예종은 왕권 강화에 힘썼다.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으로는 서울 천도, 부국강병책 등을 들 수 있다. 숙종과 예종은 수도를 개경에서 남경 즉 지금의 서울로 옮기는 시도를 한다.
고려사에는 천도의 당위성을 역설한 기록들이 많이 보인다. 부국강병책을 쓰면서 여진족 정벌 노력을 한다. 윤관은 여진족 지역 깊숙이 이어지는 곳에 여진족 공격을 막기 위한 9성을 쌓는다. 그러나 여진족의 계속되는 공격과 조공으로 9성을 돌려주기로 결정한다.

관료들의 반발로 개혁 정책 무산
개경 천도 노력은 개성지역을 기반으로 한 관료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또 윤관이 9성을 여진족들에게 반환하면서 북방 정책에 대한 비난도 극에 달했다.
경제는 악화돼 백성들의 불만도 커졌다. 인종이 즉위하면서 숙종과 예종이 추진했던 일련의 개혁 정책이 다시 원위치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있던 12세기 초에서 13세기 중반을 고려 중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려 중기에는 왕실과 외척 세력 간의 다툼으로 촉발된 혼동기다. 또 지배층이 사태를 수습하지 못해 침체기를 겪은 시기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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