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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의 본관제에 대한 재조명

2013-10-19

지난 시간에 고려의 본관제에 대해 알아봤다.
본관제는 고려 왕조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그러나 고려의 본관제에 대해 제대로 조명이 된 것은 1980년 대 이후 이다. 그간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시각 때문에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본관제에 대한 재조명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얘기를 나눈다.

고려 왕조의 특수성을 상징하는 본관제
1980년 대 이전에는 일반적인 시각으로 역사학자들이 고려사를 봤기 때문에 본관제를 그저 지엽적인 제도로 보고 그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1980년 대 이후 역사학자들이 고려의 본관제가 고려의 특수한 사회를 파악하는 핵심적인 제도임을 인식하고 본격적으로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고려 왕조의 성격을 다시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본관제로 벌집 사회구조 형성
본관제는 고려 사회를 벌집과 같은 치밀한 구조를 만들었다. 지방 세력의 강약, 그리고 특성에 따라 격에 맞는 본관과 성을 부여했다.
개경, 남경 등 경 단위 본관에서 현, 부곡, 향, 소 등 특수 성격을 띠는 지방 단위 등으로 나눠 모두 1400 여 개의 행정 단위가 있었다. 조선이 300여 개 였음을 생각하면 거의 5배에 가까운 숫자다.

본관에 대한 규제
고려 시대에는 어느 지역에 사느냐를 보면 대충 그 사람의 직위와 직업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부곡 지역에 본관이 있는 사람들은 지역 이동에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고려 왕조를 위한 토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짓고 또 왕실에 필요한 도구들을 만드는 일에 종사했다. 따라서 군역이나 과거 합격 등 특별한 상황이 없을 경우 함부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지방 세력 규합에 기여, 평민들의 자유 규제
고려의 본관제는 지방 호족 세력들에게는 일정 지역의 자치권을 부여해 중앙 왕조에 협력하게 하는 화합 정책의 근본이 됐다.
이로 인해 지방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왕조에 충성하게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반 평민들에게는 거주 이전의 자유를 규제한 측면이 있어 이후 농민 반란 등 평민들의 불만의 요인이 된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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