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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의 실리외교의 예 ‘강동 육주 설치’

2014-05-31

고려의 외교는 다원화와 실리 외교로 집약될 수 있다.
고려의 실리 외교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압록강 지역의 ‘강동 육주’설치다. 고려의 강동 육주 설치의 배경과 내용이 왜 실리 외교의 상징인지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함께 조명한다.

송과 거란, 고려의 관계
고려가 건국하던 시기 즉 10세기 말에서 11세기 경, 동아시아의 세력은 거란의 서쪽으로 송나라, 동쪽으로 고려가 위치해 세 나라가 세력 다툼을 하던 시기였다.
거란은 후진에서 국경 연훤 16주를 받아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고 960 년에 건국한 송나라는 중국의 땅인 연훤 16주를 반환하라며 거란과 대립 구도를 형성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려면 송나라의 도움이 필요했고 또 군사적으로 강력한 거란을 무시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송과 거란은 고려에게 자신들을 도와 각각 송과 거란에 함께 대항하자는 요구를 지속했다.

거란 994년 고려 침공
거란은 송나라와 전쟁을 개시하기에 앞서 고려를 압박하기 위해 994년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송나라를 공격하는데 고려의 도움을 얻고자함이었다. 고려의 사신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거란에 항복하자는 의견, 전면전을 벌이자는 의견, 또 화친 정책을 쓰자는 의견들이 있었다. 사신들 가운데 외교 전략이 뛰어난 서희가 있었다. 서희는 우선 거란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국왕에게 건의, 직접 거란의 총사령관이었던 소손녕을 만난다. 서희는 소손녕의 담판에서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는 압록강 주변의 옛 고구려 땅을 되돌려 달라고 요청한다. 거란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여진족을 물리치고 고려가 압록강 지역에 육주를 설치해 장악하도록 도와준다.

송나라와 외교 단절, 거란과 동맹 형성
거란족의 도움을 받아 강동육주를 설치한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 단절 명분을 찾는다. 거란 침공 시 송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고 송나라는 거절한다.
이를 빌미로 송나라와의 공식 외교 관계를 단절한다. 정식적인 외교 관계 단절 후에도 송나라와의 무역, 사신 교류는 지속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보면 고려의 외교정책은 전형적인 실리 외교로 현대 사회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제 식민 사학자들 거란의 침공에만 초점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고려의 거란과의 관계에서 거란의 침공과 고려의 피해 상황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 배경 속에 명백히 나타나는 고려의 실리 외교 정책은 애써 외면하는 모순이 있다. 고려의 실리 외교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더욱 자세히 정확하게 재평가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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