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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 말 개혁의 움직임

2014-07-19

고려 말에서 조선 건국까지 일련의 변화를 가져온 사건들이 일어난다.
위화도 회군, 토지개혁, 창왕 폐임 등 숨 가쁘게 돌아간 당시 4년여의 변화의 움직임에 대해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와 함께 얘기를 나눈다.

위화도 회군이 개혁의 신호탄고려말 왜구와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성계와 최영이 신흥 세력으로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최영은 보수적 인물로 개혁을 원하지는 않았다. 함경도 출신인 이성계는 늘 변화와 개혁을 꿈꿨다. 마침내 1388년 우왕 14년에 요동 정벌에 나선 최영과, 이성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는 소위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우왕을 폐위시키고 개혁을 시작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고려 말 권문 세력들의 횡포 극심고려말에는 권문 세력들의 부정부패와 횡포가 극심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은 높았고 많은 관료들과 군인들도 이성계의 개혁을 지지했다.
무엇보다도 권문세가들이 수 많은 토지를 사유화하고 백성들에게 엄청난 조세를 강요하는 등 토지의 사유화로 인한 폐해가 가장 심각했다. 이성계의 개혁 세력이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이 사전(私田)개혁과 토지 개혁이다.
이 과정에서 이인임을 중심으로 한 권문세력들의 반발과 저항이 극심했다.

토지 개혁의 필요성이 대한 상소문 이어져역사 기록을 보면 조준의 상소문 등 사전(私田) 개혁의 폐해 사례를 지목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한 상소문이 이어진다.
1388년 6월부터 1389년 12월 까지 1년 6개월 간 8~9건의 상소문이 기록돼 있다. 이 점을 미루어 짐작하면 그만큼 토지갸혁에 반대하는 권문세력들의 반발 또한 극심했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직후 토지개혁을 추진하면서 이인임 등 권문세가 1000여 명을 처단하는 등 반대세력들을 척결하고 개혁을 향해 과감한 행동을 취한다. 당시 위화도 회군에서 이성계와 함께 부사령관 역할을 했던 변한열 이라는 무장은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 권문세가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개혁을 주도하는 이성계 중심의 신진세력과 권문세가들의 대립은 조선 건국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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