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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궁예의 재조명

2014-09-27

후고구려를 이끌다 왕건의 반란으로 몰락한 궁예에 대한 후세 역사가들의 평가가 다양하다. 성공한 자에 의해 역사가 써지기 때문에 궁예에 대한 기록들은 폄하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궁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박종기 교수와 함께 후삼국 시대를 이끈 인물 중 궁예에 관한 사실들을 재조명한다.

삼국사기엔 궁예를 도덕적으로 비난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궁예와 견훤을 도덕적으로 몰염치한 인물로 폄하하고 있다.
신라 왕자 출신이던 궁예를 신라의 운이 다해 도적떼들이 창궐했는데 그 도적떼들의 일부라고 비난하고 있다. 또 신하에게 버림받은 인물로 기록하는 한편, 궁예의 나쁜 행적들로 민심이 왕건에게 돌아오게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려사에는 정책적인 비판삼국사기와는 달리 고려사에는 궁예에 대해 도덕적인 면 보다는 정책적인 실패를 거론하고 있다. 궁예가 집권하면서 내세운 정책이 옛 고구려 영토 회복이었는데 이루지 못한 점을 비판하고 있다. 후삼국의 2/3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옛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지 못한 궁예의 무능을 비난하고 있다.

궁예는 자수성가한 인물궁예는 신라의 왕자 출신이었지만 왕실에서 어린아이 때 내 쫒겨 유모의 손에 의해 자랐다. 어느 날 ‘왕자 출신의 행동이 이러면 되느냐?“는 유모의 말에 자극받은 궁예는 그길로 사찰에 들어가 승려가 된다.
서민들에게 미륵불로 자처하며 군대를 강화하며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하지만 918년에 왕건의 반란으로 몰락하게 된다.

궁예는 이상주의자역사 기록에는 궁예를 ‘포악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궁예는 이상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집권하는 동안 3번이나 국호를 바꿨다. 처음에는 고려국, 두 번째는 ‘마진’이라 했는데 ‘마하진단’이라는 뜻으로 ‘큰 동방의 나라’의 의미다. 또 세 번째는 ‘태봉’이라는 국호로 ‘화합된 영토’라는 뜻이다. 미륵불로 자처한 것도 하층민들의 염원을 이루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궁예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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