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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제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 그리고 또 다른 역사의 등장

2009-05-02

백제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 그리고 또 다른 역사의 등장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

세기의 로맨스라 불리는 백제의 서동과 신라의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 서동요는 바로 서동이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직접 지어 부른 노래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이다.

- 삼국사기 中 일부 -
6세기 말 삼국시대, 백제 땅에 마를 캐는 소년이 살고 있었는데, ‘마를 캐서 파는 아이’라 하여 이름도 ‘서동(薯童)’이었다. 과부였던 어머니와 연못 속 용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은 어릴 때부터 용기와 지혜가 뛰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멀리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가 대단히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신라 땅으로 숨어들었다. 신라에서 역시 마를 캐서 자기를 따라다니는 어린 아이들에게 나눠줘서 선심은 얻어서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다니다보니 신라 전역에 퍼지게 되었고, 궁중에서까지 퍼지게 되었다. 결국 선화공주는 궁중에서 쫓겨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마침내 서동과 만나게 되었다.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고, 이후 백제의 30대왕 ‘무왕’으로 등극한 서동은 선화공주의 청을 따라 현재 전북 익산 땅에 백제 최고의 사찰인 ‘미륵사’를 짓게 되었다.


새로운 인물, 사택왕후의 등장

지난 1월 14일,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귀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백제 무왕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국보급 유물의 출토되었는데 그중에 유독 세상의 관심을 끄는 작은 금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리봉안기’인데, 여기에 기록된 ‘백제 왕후는 사택적덕의 딸로 태어나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여기 미륵사를 세운 일이다.’란 글귀 때문이다. 지금까지 삼국유사 기록에 의지하면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는 무왕의 왕비인 선화공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나타난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전혀 얘기가 달라진다. 왕후는 사택적덕의 딸, 즉 선화공주와는 별개의 인물인 것이다.


서동의 왕비는 선화공주가 아니다?!

사리봉안기에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가 불심이 워낙 깊어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 미륵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639년에 ‘이 미륵사 석탑 안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다른 유물들도 많이 나왔지만 선화공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발견된 유물의 질이나 종류를 봤을 때 당시 백제의 고위 관리들이 지녔던 물건으로 오히려 선화공주보다는 사택적덕 같은 높은 관리들의 참여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사리봉안기의 사택왕후는 사택적덕의 딸로, 여기서 사택은 백제의 성씨이다. 사택씨 가문은 우리가 잘 모를 뿐이지, 백제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정도로 대단했던 집안이다. 백제에는 대표적인 귀족 가문 8개가 있는데, 이를 ‘대성 팔족’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첫 번째에 위치한 백제의 가장 1급 귀족이 바로 사택씨이다. 성왕 때부터 백제 정치 중심에 등장해, 금강유역을 대표하는 집안이었던 사택씨 중에서도 사택적덕은 당시 백제 최고 직위였던 대좌평을 지낸 인물이다. 게다가 딸을 왕후에 올려놓는 등 그야말로 백제의 정치를 쥐고 있던 가문이었다.


실제로 서동과 선화공주의 결혼이 가능했을까?

여기서 신라와 백제가 한강 유역의 땅을 사이에 두고 한창 분쟁 중이었던 시절에 백제의 왕과 신라 공주가 결혼을 할 수 있었을 까란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당시에도 국제간 정략결혼이 많았다는 점을 들어 당시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의 결혼도 충분히 가능했을 거라 보고 있다. 예전의 성왕이나 진흥왕 사이에서 결혼이 있었던 걸 보더라도 국제적 상황이 우호적이냐, 아니면 비우호적이냐에 따라서 혼인 성사 여부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 대응 관계에 있어서 정략결혼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으로 본다.

또한 미륵사의 삼당 구조의 배치를 통해 결혼이 가능했을 것이란 추측도 있다. 미륵사는 3탑 3금당으로 이루어진 국내 유일의 3원 가람 양식으로, 중원에 미륵 신앙에 입각한 미륵불을 모셨다. 따라서 사택왕후가 중원을 세웠다고 보긴 어렵고, 미륵 신앙자인 또 하나의 인물이 미륵사의 중원을 세웠다고 추측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중원을 세운 미륵 신앙자로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선화공주가 유력한 인물이기 때문에 미륵사는 미륵 신앙자인 선화공주에 의해서 중원이 창건되고, 법화 신앙자인 사택 왕후에 의해서 동원과 서원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는 미륵 신앙과 법화 신앙이 조화를 통해 이루어진 사찰로, 당시 무왕의 입장에서는 미륵 신앙을 통해서 자신을 미륵불로 자처하고 그 다음에 대표적인 귀족 가문인 사택 씨의 법화 신앙을 받아들여서 미륵과 법화가 조화를 이루는 사찰을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미래불’로 통하는 미륵과 그 미륵의 신앙자였던 아내 선화공주의 원을 받아들여 미륵사 창건이 시작됐지만, 당시 정치적 입김이 셌던 귀족 가문들이 대부분 법화 신앙자로 결국 자신의 입지를 더욱 견고하게 하려는 무왕의 정치적 계산이 미륵사에 녹아 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사리봉안기’의 발견 이후, 선화공주와 사택왕후에 대한 논의가 계속해서 거듭되고 있다. 학계에서는 사택왕후가 미륵사를 창건한 쪽으로 기울고 있다. 하지만 선화공주도 분명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인 만큼 좀 더 신중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 역사와 설화의 차이

삼국유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더불어 고대 역사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 한국의 고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자료이다. 삼국유사가 편찬된 시기는 원나라 간섭기 고려 충렬왕 때 승려 일연이 편찬한 일종의 설화적 성격의 역사서이다. 그 내용은 삼국 왕들의 신의한 행적과 불교 승려와 불교 유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삼국유사는 일연 스님이 많은 현장을 다니면서 유물 유적을 직접 관찰, 자료수집, 현장 상황 기록 등의 자료가 많은 반면, 설화적인 이야기도 많이 담고 있다.

삼국유사는 역사이기도 하지만 설화적인 이야기도 많아 신빙성을 의심받을 때가 많다. 미륵사 창건 설화도 그중 하나인데 창건 설화 곳곳에서 삼국유사 기록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하루는 무왕이 부인과 함께 용화산 밑 사자사에 불공을 드리러 가고 있었다.’

무왕과 왕후가 찾아가던 사찰 ‘사자사’의 존재 여부는 이미 1990년대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그곳에서 수습된 기와를 통해 삼국유사 속 사자사가 실제 고려시대까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자사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데,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 나타나자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절을 세워주십시오.”라고 청하여, 지명법사가 도술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리고 못을 메웠다.’

도술의 힘을 이용, 하룻밤 만에 못을 메우고 그 위에 미륵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는 자칫 삼국유사가 정말 설화에 그치는 기록이 아닐까 의구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실제로 미륵사터를 조사한 결과, 지층에서 과거 연못이었다는 증거가 나옴으로써 삼국유사는 어느 정도 사실에 기인한 기록임이 분명해졌다.

이처럼 역사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기록이고, 설화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서 이야기가 얽어진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설화 속에는 우리가 믿지 못할 이야기도 있지만, 그 설화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실을 추론할 수 있는 계기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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