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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끊이지 않는 논란! 정조 독살설!

2009-05-23

끊이지 않는 논란! 정조 독살설!
지난 2월, 조선의 제 22대 왕 정조가 자신의 숙적으로 알려졌던 노론 벽파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297통이 공개됐다. 이 편지는 대왕 정조의 이면을 볼 수 있게 해준 소중한 기록이지만, 이 편지의 등장이 우리 역사학계에 일으킨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또한 대왕 정조의 독살설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정조 독살설 제기

1800년 8월 29일, 정조가 사망하고 두 달 후, 왕명담당기관이었던 ‘승정원’에 이상한 사건이 하나 보고됐다.

승정원일기 中
8월 15일 추석, 인동부에 사는 ‘장시경’이라는 인물이 그의 두 형제와 주동해 노비 60명을 불러 모으고, 의관이 약을 잘못 지어 왕을 죽였으니, 그 역적을 처단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인동부는 지금의 경북 구미 지역으로 정조 독살설의 남인의 반란에서 시작되었다. ‘순조실록’에는 왕의 죽음이 심상치 않다고 여기며 조정으로 올라가려는 시도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나의 반역 행위나 다름없었던 이들의 행보는 원래 관아를 습격해 서울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관원들의 제지를 받아 오히려 퇴각했고, 추격대에 몰려 도주하다가 동반 자결이라는 결말을 맞게 되었다. 장시경 3형제는 이름 있는 명문가의 후예들로 명망 있는 선비들이 동반 자결을 택했다는 것은 이들이 왕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얼마나 강한 의구심을 가졌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 ‘한정승이 역적 심인을 천거하여 독약을 올리게 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어 당시 정조 독살설에 대한 소문이 얼마나 흉흉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정조 사망과 관련된 여러 가지 設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의 병명은 잦은 화병과 그로 인한 종기 발진이다. 하지만 정조는 사망 보름 전, 첫 진찰을 받은 후, 더 이상 내의원의 진찰과 처방을 거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정조가 의료 시스템 자체를 불신한 것인데, 그 배경에는 의료 시스템을 움직이고 있는 쪽이 자신의 제거 바라는 정치세력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내의원의 최고 책임자는 정조와 정적 관계로 알려졌던 인물인 노론 벽파의 심환지였다. 하지만 병세 악화로 어쩔 수 없이 내의원의 처방을 받게 된 정조는, 심환지의 먼 친척이었던 의원 심인으로부터 연훈방 치료를 받은 후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었다.

연훈방은 종기치료에 많이 쓰이던 방법으로 종기에 고름이 잘 생기게 하고 그것이 잘 나오게 해주는 치료법이다. 그런데 정조 실록에 의하면 연훈방에 주사가 들어간다고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자연산 주사는 인체에 흡수되지 않는데 이 주사가 황화수은으로 되어 있어 이를 태우게 되면 황과 수은으로 나뉘어 수은이 나올 가능성 있다.

수은 중독으로 인한 독살설이 제기되는 상황이지만 현재까지의 기록을 근거로 한 한의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그럴 가능성이 너무 낮다는 것이다. 연훈방을 사용한 기간이 짧고 연훈방에서 나오는 수은의 양 자체가 별로 많지 않아 중독의 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정조 실록에 보면 급성 수은 중독에서 나타나는 구토, 기침, 복통, 불면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있지 않아 급성 수은 중독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은 적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발견된 정조 어찰의 기록을 놓고 보더라도 정조의 죽음은 ‘의도적인 의료사’보다는 자연사에 더 가깝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사망 13일 전,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편지 내용 中
뱃속의 화기가 가라앉질 않는다. 약을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몰라. 약을 냉수 마시듯 하고, 차가운 바닥에서 자꾸만 뒤척이게 되니, 아무래도 몸이 정상이 아닌 듯싶어, 고생스럽구나.

정조실록의 내용 볼 때, 정조는 재위 말년에 체력과 기력이 바닥 난 상태였다. 그러면서 신하들과 대립 구도는 강했기 때문에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일일이 지시하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조로 증상과 등창이 연계돼서 과로사로 죽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더 강하다. 또한 정조가 종기였다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진 과정에서 다른 약물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표면적으로 공개된 자료만으로는 독살설을 판단하는 것이 부적절해보이지만, 정조의 치료 상황과 병 진행 상황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조 사망 당시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인물은 정순왕후로, 정조는 사망 전에 ‘수정전’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시 수정전은 정조와 갈등 관계에 있던 왕대비 정순왕후의 거처를 이르던 말로, 의미심장한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었는지 기록이 너무 짧아서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정순왕후가 정조의 죽음 당시 독대한 것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정순왕후는 일찍이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숙이 관여해 노론 벽파와 같은 노선에 있던 인물이다. 일각에서는 노론 벽파와 심환지 모두 정순왕후의 조종을 받는 세력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정순왕후가 정조를 독살할 만한 배경이라면, 오라버니의 죽음과 더불어 가문의 위기, 그리고 정순왕후 스스로 정치력이 강한 여자라는 점이다. 일찍 시집와서 정치 세력 속에서 평생을 살아 온 정순왕후는 정조의 왕권 강화책 때문에 밀려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영향력 행사를 위해서 정조를 제거하고자 한 동기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사도 세자 문제와 더불어 왕권 강화를 추진하는 정조의 개혁 방향에는 기본적으로 찬성할 수 없는 입장이다. 둘 사이는 화해가 불가능한 관계로 독살의 또 다른 배경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결국 이런 정황 또한 심증만 있을 뿐이지 물적 증거나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만 해도 정국 구상을 밝혔기 때문에 한 달 후에 세상 떠났을 때 사람들은 큰 충격 받았다. 사람들은 정조가 독살 당했다는 것에 더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데, 이는 정조가 독살을 당하지 않고 살아있었더라면 새로운 다른 역사를 썼을 것이라는 좌절과 절망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정조와 같은 입장에 서 있던 남인들 사이에는 정조가 독살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당시 경상도 지역은 정조와 정치적 행보를 같이 했던 남인들의 본거지로 결국 정조의 독살설은 당시 치열했던 당파 싸움의 단면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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