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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빼앗긴 보물, 외규장각 도서!

2009-05-30

빼앗긴 보물, 외규장각 도서!
지난 2월 중국 정부가 프랑스를 상대로 약탈문화재 반환 요청에 나섰다. 프랑스는 1860년 2차 아편전쟁 당시 약탈한 청나라 시대 문화재를 경매에서 판매한 것이다. 이 일은 우리나라와도 관련이 있는데, 우리나라 역시 프랑스에 약탈당한 문화재가 있다. 바로 외규장각 도서이다.


외규장각 도서

누구보다 왕권 강화를 꾀했던 정조는 즉위 즉시 규장각을 설립해 1층에는 자신의 왕권을 상징하는 물품을 보관하고 2층은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규장각은 유학을 중시하는 기구로 만들어졌지만 실제로는 강화된 왕권의 상징이자 정조의 핵심 권력기관이었다.

1782년 정조는 천혜의 요새라 믿었던 강화도에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외규장각을 설치했다. 외규장각에는 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책들과 왕실의 유물 중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들만 따로 모아서 보관했다. 외규장각은 한 국가의 모든 학술, 문화, 여러 가지 기록을 집대성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던 곳으로 아주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 중 가치를 논하기 힘들 정도로 소중한 기록은 또 따로 있다. 중요한 의식이 있을 때 하나의 본보기로 삼아서 그 다음에 행사가 있을 때 모범적인 전례를 따라서 그대로 국가 의식을 치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 편찬된 ‘의궤’이다. 그것도 왕이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였다. 의궤에는 행사를 언제 시작했고, 누가 결정을 했고 주관은 누가 했으며, 어떤 장인들이 동원되었고, 당시 임금은 누구였는지 완벽한 재연과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국가 행사 내용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의식 연구도 되지만 토목 공사나 경제사적인 접근도 가능한 자료로서 문화적으로도 가치 있는 기록이다.


어떻게 빼앗기게 되었나?

1866년 대원군은 천주교 금지령을 내려 당시 한국인 찬주교도 수 천 여명을 비롯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처형했다. 그해 10월 프랑스 로즈 제독 함대의 침공 대상이 됐던 지역은 다름 아닌 강화도다. 상대적으로 방어가 허술했던 강화도는 단 며칠 만에 프랑스군에 점령당했는데, 이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이다. 프랑스군은 무모한 양민을 학살하고 외규장각 안에 있던 귀중한 물건들을 불태웠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도 타격을 입기 시작하자, 11월 7일에 정족산성 전투를 끝으로 프랑스가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그 와중에도 귀중한 물건들을 꼭 챙겨갔는데, 당시 로즈 제독이 프랑스에 보고한 수습 목록에는 ‘묶어서 보관한 큰 책 300권, 작은 책 9권, 흰색 상자에 든 소책자 수십 권과 1개의 지도, 족자 7점, 갑옷과 투구 등 359점을 보고합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외규장각 도서를 찾기 위한 노력

외규장각에서 약탈당한 책의 행방이 처음 밝혀진 것은 1978년으로 재불 한국인 학자였던 박병선 박사에 의해서다. 덕분에 다각도로 반환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프랑스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1988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에서 로즈 제독 편지를 발견하면서 정식 반환 운동의 물꼬가 다시 열렸다. 반환요청이 계속되자 1993년 프랑스에서도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고속철 차종 결정을 앞두고 있었는데 미테랑 대통령이 프랑스 테제베를 낙찰시키기 위한 명목으로 한권의 의궤를 직접 들고 왔다. 하지만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대한 공식 협상을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프랑스 외무성에서는 미테랑의 반환 약속은 약속이 아니었다며 지금까지 계속 발뺌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문화재 반환을 위해 바로 프랑스 국내법으로 소송을 했다. 결과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하지만 확실한 건 외규장각의 우리나라의 문화재인 만큼 언젠가는 돌려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다. 그리고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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