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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철의 왕국! 가야를 찾아서

2009-06-13

철의 왕국! 가야를 찾아서
1970년대 이후, 김해 지역에서 연이어 고분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창원의 다호리 유적지, 김해의 양동리 고분, 대성리 고분 등에서 출토되는 유물에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16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철갑옷과 철 투구 등 고대 철제기술의 정수로 인정받는 유물들이었다.


철의 왕국 가야!

철의 왕국으로 불리는 가야국에 비해 비교적 더 선진국으로 알려졌던 고구려, 백제, 신라에도 당시에는 가죽 갑옷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가야의 철갑옷은 더욱 신비로운 존재이다. 철갑옷은 철판과 철판을 맞춰 구멍을 뚫고 못을 집어넣어서 양쪽에서 두드려서 압착시키는 것으로 철을 가지고 사람 몸에 꼭 맞는 3차원의 갑옷을 만든다는 건 현재의 기술자들도 난색을 표하는 일이다. 철갑옷의 생명은 철을 얼마나 부드럽게 다룰 수 있고, 그 철을 얼마나 정교한 ‘판갑’, 즉 얼마나 ‘얇은 철판’으로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철갑옷은 입체적인 구조물이기 때문에 특별한 기획성이나 단조기술 없으면 만들 수 없다. 판갑의 변화를 통해 같은 종장판 판갑이라고 해도 철판의 폭이 얼마이고, 철판의 만곡도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단조 기술의 발달을 가장 여실히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판갑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는 뛰어난 기술뿐만 아니라 철도 많았다. 그래서 철갑옷은 물론 철을 매매할 때 돈처럼 사용하고, 해외에 수출하기도 했다.


고대 사회 세력의 힘! 철의 발견

고대 사회에서 철을 장악한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어 있었다. 철제 무기를 지닌 세력과 청동기 무기를 지닌 세력이 맞붙으면 당연히 철제 무기가 이기는 것처럼 철의 소유는 곧 힘의 소유로 이어졌다. 때문에 철광산을 개발하고 철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 가진 사람이 가야 지역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며, 철을 생산하지 못하더라도 철의 공급로를 확보한 세력은 핵심 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당시 철을 수입하던 인접 국가 중 유난히 적극적이었던 나라는 일본이었다. 서기 5세기 무렵까지 철을 생산하지 못했던 일본의 최대 과제는 바로 철 확보였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철의 수입권을 장악하는 것이 힘을 키워나가는데 가장 큰 요소였으며, 철 수입로를 장악함으로써 정권을 이뤄나갈 수 있었다. 가야는 철의 대가로 일본에게 군사력과 무기를 제공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같은 사실은 광개토왕릉비에서 기록하고 있다. 가야와 일본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고 신라가 그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구원요청을 해 광개토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으로 가야를 공격한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를 공격하는 가야와 일본의 연합군이 이런 문물의 수수관계를 통해 맺어져있던 정치적인 연락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농경국가라고 알려져 있던 금관가야 중심의 가야 땅이 이전에는 바다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해상국가’라는 별칭 또한 얻게 되었다. 가야는 국제성을 띤 세련된 문화를 가졌던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국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의 이런 사회적인 성격 때문에 서기 3,4세기에는 가야가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도 앞서 가는 발전상을 보여줬다.


가야의 재발견!

그러나 신라와 고구려의 연합군에 의해 가야의 중심 세력이 큰 충격을 받으면서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남한에서 가장 큰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경주 황남동 고분군으로 황남동 고분군은 계속 커지지만 대성동 고분군은 목곽의 크기와 깊이가 줄어들었다. 대성동 고분군의 축조 중단은 전기 가야 연맹 전체를 지배하던 집단이 그 절대적인 지위를 잃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은 알면서 철의 나라 가야를 알지 못했던 것은 승자의 역사가 강하기 때문이다. 신라가 삼국 통일하면서 한국은 삼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바로 연결되고 그것이 고려로 통일되었다는 인식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가야는 존재하지 못했다. 아마도 후대 신라의 역사 인식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통해서 전승됐고, 고구려, 백제, 신라 중심의 역사 인식 배우게 되면서 조선 시대에 와서도 가야의 존재를 몰랐던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역사에서 가야사는 지금까지 우리가 삼국시대라고 도외시해왔던 역사의 한 부분을 복원해 진정한 우리 고대사의 복원이라는 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고구려, 백제, 신라에만 국한되어 왔던 고대 문화가 보다 더 풍부하다는 것을 새로 발견하게 되었으며, 지역적으로 영남 지역의 고대사도 더듬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라진 역사를 찾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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