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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 고대사의 바이블, 삼국사기를 논하다.

2009-06-27

한국 고대사의 바이블, 삼국사기를 논하다.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왕의 업적을 다룬 '본기'와 삼국을 비교해 기록한 '연표', 삼국의 제도와 풍습을 기록한 '잡지', 마지막으로 삼국의 인물들을 다룬 '열전'으로 총 50권, 9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서이다. 보물 525호로 경주 옥산서원에서 소장 중인 삼국사기는 1145년 김부식에 의해 편찬되었다. '옛 왕조의 역사를 정리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먹은 인종은 편찬책임자 김부식을 비롯해 총 11명의 편찬 관련자들에게 역사서를 집필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김부식은 중국 역사에 비해 삼국의 기록은 빠진 내용이 많고 문장 또한 형편없어 교훈을 주기 힘들다는 생각에 책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삼국사기 논란의 중심. 김부식

그러나 삼국사기는 오랜 시간 비판 받았는데 그 논쟁의 핵심에는 김부식에게 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재상의 반열까지 올랐던 당대 최고의 권력가로 그가 활동했던 12세기는 요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고려 삼국이 안정된 삼각구도를 이룬 시기였다. 당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등장으로 여론은 양분되기 시작했다.

한편 이때 왕실 개혁과 금나라 정벌을 기치로 묘청이 지금의 평안인 서경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주장해 이른바 '묘청의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금나라와 화친을 맺어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던 실리주의자 김부식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고 결국 직접 토벌원수가 되어 묘청의 난을 진압했다. 신채호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자주성을 잘 반영한 것을 묘청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묘청의 천도 운동을 진압한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사대성을 가졌고, 신채호는 김부식 때문에 우리나라 영토가 줄었다는 주장까지 하기에 이른다.


자주성에 대한 또 다른 논란

하지만 삼국사기에 대한 비판은 그 전부터 있었다. 조선시대 중국 성리학을 받아들인 유교 중심의 학자들 입장에서 삼국사기는 모화사상이 부족한 역사서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삼국사기는 중국 사서를 그대로 베껴 자주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김부식이 사대주의적인 역사가라 비난받고 있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사정을 모르는 후대의 표현이다. 당시 시대적인 하나의 사조이고 김부식이 그런 사대적 중국 측 자료를 많이 이용하면서도 고구려와 수당과의 싸움에서 고구려가 승리한 것을 상당히 기쁜 마음으로 우리 군사, 또는 우리 사신으로 쓰고 있다. 고구려 본기에서도 우리 사신, 우리 군대, 또는 우리나라라고 쓰고 있다. 오히려 삼국사기는 중국사서의 불합리한 점을 비판하고, ‘신라 본기, 고구려 본기, 백제 본기’라는 구성 명칭을 사용했다. 이를 보면 자국의 역사에 대해 떳떳함을 보인 역사서라고도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대한 끊이지 않는 논란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삼국의 초기 모습과 관련해 삼국사기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우고 알던 삼국의 초기 모습에서는 3세기까지 신라와 백제가 조그만 소국에 불과했는데, 이는 중국의 사료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근거로 했던 사실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백제와 신라가 이미 2세기에 주변 지역을 통합한 상당한 세력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삼국지 하안조의 기록을 따르면 3세기까지 각 지역에 모두 소국만 있었다고 말한다. 삼국지 기록을 따를 경우하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따를 경우 만들어지는 역사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3세기라는 것이 그런 거대한 정치세력이 만들어지기 위한 준비단계의 모습은 고고학적으로 충분히 증명한다. 삼국사기 처음부터 기원전 1세기부터 큰 국가 만들어 출발했다 하는 것은 지금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는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상반된 논쟁이 일고 가운데 1999년 백제의 유적지로 알려진 풍납토성에서 논쟁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중대한 발굴이 있었다.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적지로 이곳에서 토성 건축 당시에 쓰인 목재 유물이 한 점 발견되었다.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판명되어 학계는 흥분에 휩싸였다.

통설로 받아들였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백제를 마한의 속국 중 하나로 그리고 마한 일대에는 성곽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2세기경 백제가 주변국을 서서히 통합, 왕조 체제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과연 어느 기록이 더 믿을 만한 것인지 풍납토성의 축조 연대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을 가름 짓는 중요한 과제가 되어 지금도 연구 중에 있다. 이 외에도 확실한 증거들이 빨리 나와서 더 이상 삼국사기가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일은 없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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